일간 연 13화
여행만 가면 여행지의 독립책방에 들러서 책을 한가득 사는 버릇이 있다. 덕분에 집에 가는 길 캐리어는 항상 어깨가 빠질 것 같이 무겁다. 여행 경비의 1/5 정도를 책값으로 쓰는 일은 흔하다. 그렇게 사온 책을 숙소 침대에 늘어놓고 가장 읽고 싶은 책부터 차근차근 읽으면서 여행지의 밤을 보내는 일이 나에겐 가장 즐거운 일이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여행을 갈땐 항상 아이패드를 챙겨간다. 아이패드로 전자책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고 그걸로는 어깨를 혹사시킬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를 챙겨서 적당히 경치가 좋고 조용한 카페에 들러 몇 시간이고 책을 읽는 일은, 과장 하나 없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집중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을 보고 이곳이 여행지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정말 못 견디게 즐겁다. 그게 내가 여행을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들렀던 서점 중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제주의 <책방 풀무질>이라는 곳이었다. 제주공항 건설 이슈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느끼고 있기도 하고, 흥미로워 보이는 책이 너무 많았는데 고작 4권(고작...?)밖에 못 샀다는 아쉬움도 있고, 무엇보다 계산을 할 때 사장님께 들었던 말이 마치 내 인생의 슬로건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 권을 턱하니 집어든 나를 보더니 사장님은 "책을 많이 사셨네."라고 말씀하시며 덧붙였다. "책을 사느라 굶으면 굶어도 괜찮은 것 같지요."
물론, 실제로 굶는 건 그렇게 유쾌한 행위가 아니고 나도 책을 사느라 굶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기분은 정말 알 것 같다. 책을 살 때만큼은 돈 걱정에서 조금은 해방되는 기분, 오늘 책을 사서 가방이 한 짐 되더라도 뭐 어떠랴 하는 마음. 몇 끼쯤 간소하게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무턱대고 책을 사버리는 그 태도. 그렇게 나는 며칠씩 냉장고를 파먹고 살아야 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책을 사모으는 버릇은 이번에 대청소를 하면서 빛을 발했다. 온 집에서 온갖 책이 나왔다. 소설이며 사회과학 도서며 만화며 학회지며, 온갖 곳에서 튀어나오는 책을 끌어모아 쌓아놓으니 1m 정도는 되었다. 개중에는 텀블벅 펀딩까지 해가며 힘들게 산 책도 있었고, <책방 풀무질>에서 산 책들처럼 멀리 떠나서 산 책들도, 초판 한정으로 작가 사인본을 준다는 이야기에 월급날을 앞두고 비어가는 통장도 상관 없이 사 버린 책들도, 선물로 받았거나 누가 버리는 걸 주워왔거나, 친구가 출판하면서 나에게 헌사한 책도 있다(내가 교정교열을 봐줬기 때문이다). 멀쑥한 중고서점에서 산 책도, 신촌의 공씨책방과 같이 손때 묻은 책들이 가득 쌓여 있는 한 가운데서 보물찾기처럼 집어든 책들도 있다.
어릴 때는 10시가 되면 자야 했기 때문에 방에서 몰래 스탠드를 켜놓고 새벽이 지날 때까지 책을 읽곤 했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냥 자정이 훌쩍 넘을 때까지 혼자 밝게 불을 켜 놓은 방에서(불을 꺼 놓은 방에서 책을 읽으면 눈이 침침해져서) 마음 놓고 이 책들을 읽는다. 책을 읽고 있으면 가슴에 뭔가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비록 사방이 꽉 막히고 어딘가에 배달음식 쓰레기가 쌓여가고 있는 내 좁은 방에서 읽는 책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좋다.
내 삶을 살게 한 원동력의 반을 글쓰기라고 한다면, 나머지 반은 책 읽기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말이지 책을 파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내 우울을 버티게 했던 작가들의 이름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신경숙, 박완서, 공지영,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 이름 없는 여성에게 이름을 붙여준 이들. 아직도 그들의 소설 중 몇 구절은 내 삶에서 비극적이나 희극적인 순간에 곧바로 떠오르곤 한다. 어떤 순간을 정의할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그렇게 언어를 가질 수 있었기에 나는 책을 계속 모았고 끊임없이 읽었다.
그러고보면 여행지에서 새로운 책을 사는 일은 낯선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얻어가는 일일지 모른다. 언제나 익숙했고 그리운 냄새가 나는 언어를 떠나, 새것 냄새가 잔뜩 풍기는 언어를 찾아가는 일.
오늘도 나는 서점을 돌아다니며 사고 싶은 책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그 책들은 또 어떻게 파먹고 살아가게 되려나. 나를 살게 한 책들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