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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an 10. 2022

내가 만약 임신을 한다면

일간 연 14화

'내가 만약 임신한다면'이란 생각은 가임기 여성이면 한번쯤 해봤을 상상이다. 특히 생리가 늦어진다거나, 이유없이 몸이 아프다거나, 주변에 임신한 사람이 생긴다거나, 오묘한 꿈을 꾸었다거나 하는 등 신변에 뭔가 희한한 일이 생기면 '아니 설마 임신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 마련이다. 가임기에 남자랑 성관계를 한 적이 있다면 그 생각의 농도가 더 짙어지고, 그런 적이 없다면 조금은 공상의 성격을 가지지만 어쨌든 뭔가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라는 데는 틀림이 없다.


사실 생리가 늦어지는 것은 굳이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스트레스 등의 원인에서 기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경우 '내가 만약 임신한다면'이란 생각은 빗나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임신이 가능한 몸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가임기 여성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 같다(내가 가임기 여성이라서 이렇게 썼지만 가임기 여성이 아니라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오묘한 꿈을 꾼다거나 주변에 임신한 사람이 생긴 것 역시 딱히 나의 임신과는 관련이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임신 가능한 몸이라는 것을 주지받기 때문이다.


당장 초경을 마주하면 주변 어른들이 하는 말은 '엄마가 될 수 있는 몸이 됐네, 축하해' 등의 말이다(왜 축하하는지 나의 상식으론 알 수가 없다). 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없는데. 또는 '몸 조심해라'는 등의 말을 듣기도 한다. 헤테로 섹스는 남녀 둘이 하는 건데 왜 여성만 몸 조심해라는 말을 듣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듣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 내가 이전과는 다른 몸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임신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임신이 가능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이전과 달라질 것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당신이 헤테로 섹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조금 풍파가 닥칠 수도 있다.


생리를 시작하면 '생리 달력'과 같은 어플을 쓰기 시작한다. 내 세대 이전에는 달력에 일일이 생리 날짜를 표시해가며 계산했다고 하지만 요즘은 어플을 쓰는 게 대세인 것 같다(나 역시도 어플을 쓴다). 헤테로 섹스를 하기 전에는 이런 어플이 그냥 '헉 빨리 생리대 갖고 다녀야지'라는 신호를 알려주는 반면, 헤테로 섹스를 하기 시작하면 이 어플은 나의 불안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헉 뭐지 왜 생리를 안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어플인 것이다. 생리 예정일이 되었음에도 생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드라마 등에서 여성 등장인물이 달력을 들춰보며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부터 헤테로 섹스를 하는 가임기 여성에게는 '내가 임신한다면'이라는 생각이 한달에 한번씩 찾아오는 폭풍우가 된다.


이 생각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고 있음에도 생리를 하고 있지 않으면 임신테스트기를 구매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된다. 요즘에는 다행히 임신테스트기를 편의점에서도 판다. 그러나 편의점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살 때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편안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헤헤 이거 사실 친구한테 사주는 거임 이라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지, 무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지, 허허 어쩌다 보니 제 인생에 이런 일도? 라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지, 그런 건 '엄마가 될 수 있는 몸이 됐네'라고 한 어른 중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쨌든 대충 어떻게든 표정을 짓고 임신테스트기를 사오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정말 콩닥거리기 시작한다. 임신을 하게 되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인생이 꽤 달라질 것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빨간 줄 두 줄'은 꽤 유명한 관용어일 것 같다.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하고 테스트 결과지의 색이 변하는 약 1분 동안은 마치 누가 내 목에다가 밧줄을 걸어놓고 매달까 말까 하고 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침내 빨간 줄 한 줄이 뜨면 '와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같은 기분이 된다. 이렇게 천지신명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가임기 여성의 운명은 얼마나 잔혹한가.


그러나 임신테스트기가 100%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생리가 없다거나 뭐 기타 등등 희한한 증상이 있을 경우 내가 임신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것저것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임신부에 대한 논문을 썼었다. 문제 제기를 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논문을 쓰는 걸 보면 난 천상 대학원생인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논문을 쓰지 않고 에세이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상상을 한번쯤 해본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그런 상상을 하는 여성들은 알았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당신이 바라는 그런 결과가 나오기를, 그리고 생리가 너무 늦어지면 기타 산부인과 질환일 수 있으므로 병원에 가자. 병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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