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표내고 싶었던 적 없어?"

사표는 모르겠고, 휴직하고 싶었던 적은 있지

by Brightly



오늘 오래간만에 지인과 밥을 먹었다.



지인이 먼 곳으로 발령이 났던 데다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 19로 인해 공무원들 모두 약속을 잡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던 터라, 어찌어찌 2년 만에 보는 거였다.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으며 근황도 나누고, 일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그 친구와 내가 일하다가 만난 사이이고 둘 다 공무원이다 보니, 아무래도 일이 주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승진에 대한 스트레스도 나누고, 경직된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신입사원들의 복장이나 태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보고서 고치는 것에 대한 고충도 이야기하고... (주로 그 친구가 얘기를 하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묻는 거다.

너는 사표 내고 싶었던 적 없어?


나는 대답했다.

응. 없어. 휴직하고 싶었던 적은 있었어도, 사표까지는... 나는 이 일이 천직인 것 같아.


그 친구가 답했다.

천직이라니 좋네. 그렇지만 휴직이나 사표나 그게 그거지... 나는 사표 내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이야.


나는 물었다.

왜, 뭐 때문에 사표내고 싶었는데?


그 친구가 얘기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을 때.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 알잖아, 우리 하는 일들이 사장님들 바뀔 때마다 변동도 심하고, 정치적인 부분에 영향도 많이 받고... 그러다 보니 회의감이 들더라고. 게다가 우리는 특히 경직되어 있다보니 내가 뭔가를 건의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도 없고 바뀌는 부분도 없고...



나는 그 친구의 마음을 십분 공감했다. 그 회의감과 무력감. 나도 많이 느꼈던 것이니까. 어쩌다 보니 내가 맡았던 업무들이 그런 부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업무들이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별별 상황들을 많이 겪기도 했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거듭 직면할 때면 특히 회의감이 심했다. 덕분에 한숨과 한탄이 많이 늘었었지... (어쩌면 이런 고민은 사실, 공무원이 단순히 직업적으로 좋아서 들어온 사람들보다는 나나 그 친구처럼,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이 투철한 경우 더 치명적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최근 그 고민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터라, 그 친구에게 내 생각을 나누었다.



그 마음 나도 너무 잘 알지. 나도 한 때 그런 마음을 많이 느꼈었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했던 일들이 좀 그런 일들이잖아. 정치와 정권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고, 때로는 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을 때도 있고... 윗사람들은 본인 임기 내에 성과를 보일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하고, 정작 장기적으로 중요한 과제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때로는 잠깐 있다가 가는 사람들이지만, 나나 너 같은 늘공들은 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중심을 잘 잡고, 상황이 변하더라도 중요한 부분들이 지켜질 수 있도로 노력해야겠구나, 하는 생각. 보이지 않고 티도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길게 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 나가야지 하는 생각.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건 어찌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니까.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할 말은 하는 편이잖아? 사실 나는 내 이런 소신이나 성격을 죽여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오랫동안 고민했었어. 근데 최근 일하게 된 팀에서 모시게 된 윗분들 덕분에, 그러지 않아도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oo부에서 일할 때는, 내 이런 부분을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았거든? '그냥 시키는 대로 하지' 이런 말을 늘 들었지. 그런데 지금 있는 곳에서는, 내 이런 소신과 신념과 전문성을 좋아하실 뿐만 아니라, 아주 높게 평가해주셔. 그리고 윗분들도 그렇게 자신들의 윗분들에게 소신대로 직언을 하시는 분들이고. 그러다 보니까 나는 다행히도 '아,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직언을 해 버릇하는 내 성향을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정말 좋아해 주시고 인정해주시는 분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렇게 귀감을 보여주신 분들 덕분에, 공무원으로서 높은 자리에 갔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의 공직자가 될 지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달까...?

그러니까 길게 보자 우리. 좀 힘들겠지만, 우리 같은 공무원들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으니까. 우리가 중심을 잘 잡자.



말하는 중간중간 나도 살짝 울컥했지만, 그 친구도 눈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 친구가 티 나지 않게 살짝 눈물을 닦는 것을 못 본 체해주었다. 그 친구가 덕분에 공직자로서의 소명감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며 웃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뻤다. 그 친구는 내가 멘털이 강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웠지만,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나는 정말 포기를 잘하는 타입이거든? 나도 수없이 바닥을 찍은 것 같아. 근데 포기하고 바닥을 찍고 나면 또다시 그런 의지를 갖게 되다 보니까... 겉보기에는 그런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어.'



그렇게 의지를 돋우는 얘기를 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도 두려움이 크다. 앞서 말했듯이, 처음 공직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의 사명감을 흔들어댈 정도의 여러 가지 상황과 이로 인한 회의감과 무력감. 그리고 때로는 자괴감. 앞으로 공직생활을 하면서 이런 부분들에서 또다시 힘들어지는 상황이 (어쩌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나도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점점 더 나아질 거라고... 할 수 있다고 믿는 수밖에는 없어.
해주고 싶은 것들도, 지켜내고 싶은 것들도 많이 있으니까,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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