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해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다시 한번 지나치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 안에는 죽음에 대한 갈망이 있다. 언제 생겨났는지를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갈망이다. (나의 지나친 솔직함으로 인해 행여 놀라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물론 내가 이러한 갈망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옮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러한 갈망을 인지하게 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이러한 어둠과 비정상적인 갈망이 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하고는 했다. 이를 대체 어떻게 없애야 할 것인지, 혹시 이러한 것들이 삶을 살아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늘 궁금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과 기도와 탐구의 과정 속에서 죽음에 대한 갈망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된 원인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치유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나는 실제로 자살시도를 했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안타까움과 긍휼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아이를 돕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아직 완전히 치유받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다른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듯이, (구하려다가 둘 다 익사하는 상황이 될 수 있기에) 내가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나 자신이 치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글은, 나의 치유를 위한 글이자 혹시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를 위한 글이다. 우선 이와 관련해서 매우 통찰력이 있는 책의 내용을 나눈 후, 이러한 내용에 대해 나의 경우는 어떠한지를 (서로에게 필요한 공감과 격려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적어보고자 한다.
아이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가정에서 태어난 아기는 출생 시부터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여러 가지 다양한 충격들(예를 들어 싸움, 말다툼, 큰 소음, 해로운 감정들)이 침입해 들어왔다고 해보자. 이로 인해 아이의 영은 이 병든 세상을 살아갈 동안 만나게 될 온갖 잡다한 더럽힘(defilement)을 이겨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머리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영(spirit)은 이미 더 이상 이곳에서 살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죽고 싶은 마음은 점점 더 확고해져 간다.
(그리고) 죽음의 소원이 일단 우리 안에 자리를 잡으면, 이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죽음의 소원은 운동 감각이나 자신감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망설이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어떤 이는 마치 삶의 기쁨과 열정으로 모두 상실한 것처럼 늘 구부정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고뇌에 찬 눈빛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온다. "저는 이 안에 들어있어요. 제발 누군가 좀 오셔서 저를 꺼내서 살려주세요." 어떤 이의 눈에서는 탐욕스러움이 느껴진다. 이들 모두가 의식적으로는 살기를 원한다.
죽음의 소원을 은폐하고 있는 이들은 재능을 억압하고 살아간다. 비록 영은 깨어있지만, 모험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들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볼 때가 많다. 꽃봉오리가 꽁꽁 얼어 있어서 꽃받침을 터뜨리지도 못하고 꽃잎을 활짝 피우지도 못하고 있다. 기도 중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매우 영화롭고 아름답게 꽃 피우게 하시려는 모습을 본다. 이런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격려가 필요하다. 그럴 때 비로소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다. 그리고 자유로워짐에 따라 적극적으로 삶을 선택해 나가게 될 것이다.
죽음의 소원을 가진 사람의 영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그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분노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무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자신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한 가지 망상이 자리 잡고 있을 경우가 많다. 자신이 누군가에 대하여 분노할 때, 반드시 그 대상은 내가 분노할만한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망상이다. 물론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저절로 사그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분노할 때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놓았는지, 왜 우리를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 속에 보내셨는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몹시 필요로 했던 순간에 왜 우리와 함께 해주지 않으셨는지 등이다. 물론 주님은 그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셨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주님이 정말로 그때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뿐이다.
누군가에게 죽음의 소원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고 싶을 때마다, 혹은 누군가가 정말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폴라와 나는 질문지를 사용한다. 이 질문지를 사용할 때는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질문을 듣고 즉각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당신이 세상에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졌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처음 태어난 시간과 장소를 그대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현재 부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부모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현재의 인격과 개성을 그대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인격과 개성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좋아합니까? 만약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셔서 '네가 선택한 것을 너에게 해 주려고 한다. 너는 앞으로 펼쳐진 긴 인생길을 걸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나와 함께 지금 당장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다.'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질문을 마치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생일과 태어난 곳이나 부모님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왜 더 나은 모습으로 당신을 만들어주지 않으셨느냐고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곧장 하늘나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당신이 하나님께 이 세상의 삶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많은 이들이 소홀히 여기는 것 한 가지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비난받을 만한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상담 사역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있다면, 내담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도록 해 주는 일일 것이다.
"제가 주님을 필요로 했을 때, 주님은 어디 계셨나요? 양심적인 육신의 아버지라면, 필요한 것을 무엇 하나 제공해 주지도 않으면서 이토록 멀리 방치해 놓지만은 않을 거예요. 주님은 신경도 안 쓰이세요?"
하나님은 정말로 신경을 쓰신다. 그리고 이를 위해 너무나도 끔찍한 대가를 이미 치르셨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는 발상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우리는 전문 상담자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심리 상담자들이 그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 그룹 안에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결코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평균치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자신이 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둘러 성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자신이 아이라는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일에 몰두해 온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신앙의 기초 단계를 소홀히 여기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은 상태의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다.
세상의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마치 코흘리개 꼬마와 같은 자신들의 모습을 회피하고자 너무나 성급하게 성장만을 꾀하여 오고 있다.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면 아이를 회피하는 것만은 절대 불가능하다. 용납되지 못한 내면 아이는 끊임없이 골칫거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 내면 아이를 숨겨두고 있는 한, 우리는 실수와 어리석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내면 아이를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이는 죽음의 소원으로 발전할 위험이 매우 높다.
일단 죽음의 소원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진단되면, 이는 기도 사역을 통해 치유가 가능하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기꺼이 생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내담자가 이 질문에 대해 확신 있게 답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내담자의 내면 아이를 치유해주시고 그를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도록 요청한다.... 끝으로 내담자에게 생명을 선택하는 일을 매일매일 꾸준한 훈련을 통해 계속해 나갈 것을 부탁한다.
사역은 단순한데 비해, 얻어지는 결과는 너무나 엄청나다. 매번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자유를 누리면서 주님이 주신 풍성한 삶을 즐기고 있다는 간증을 우리에게 편지로 보내온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 존&폴라 샌드포드, <상한 영의 치유> 1권에서 발췌 -
고백하건대, 나의 경우 내가 위에 발췌한 거의 모든 내용에 해당된다.
나는 (아닌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으며, 선택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께 하늘나라로 데려가 줄 것을 요청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나의 내면에서는 하나님께 분노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지만, (아주 강하게 '내가 그럴 리 없다'라고 생각해왔기에) 이를 1년 전에서야 겨우 자각할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표출되던 순간, 나는 너무나도 놀랐다. 내 안에 이러한 원망이 있었다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주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으며, 서둘러 성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금 솔직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은, 내가 아직 완전히 치유받고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 하나님을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기도를 해 나가려고 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해 나가고자 한다. 생명을 선택하고 예수님의 치유를 요청하고자 한다.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한편으로는 놀랍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치유와 자유함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 내가 만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죽음에 대한 갈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나의 앞으로의 삶은 얼마나 생명력 있고 풍성해지게 될까?
죽음의 영이 세력을 떨치고 죽음에 대한 갈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이러한 자유함을 위한 노력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를 접하게 될 때마다, 그 마음이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어서 슬프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안타깝다. 아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것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이지,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아닐 것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위해, 우선 나부터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여봐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굳게 하면서... 이만 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17]
이 책의 다른 부분들에서 언급되고 나 역시 경험한 부분이지만, 하나님께서 치유를 시작하실 때에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하신다. 오랫동안 감추어져 왔던 내면의 어둠을 드러내고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하신다. 누군가는 이를 우리 마음속의 방 안에 있는 '오래된 옷장'을 여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먼지가 쌓인 채 오랫동안 방치해 둔 옷장을 열 때, 누구나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여실 때는, 이를 깨끗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면의 치유를 위해서는 우선, 예수님께 옷장을 열고 깨끗이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무언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삶과 내면에 문제가 있는 것이 느껴지는 분이 계시다면, 예수님께 기도로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함께 용기를 내어 자유해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