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그의 이야기 1
그녀의 이야기 - 애도의 시간
꽤나 지치는 하루였다. 일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멍해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카페인으로 애써 각성시켜가며 맑은 머리로 처리해도 어려울 일들을 처리하느라 약간 번아웃이 되었다고 할까. 그녀는 신발을 벗자마자 욕실에 들어가 - 아직 외투도 벗기 전이었다 - 뜨거운 물을 틀었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나서는 - 가끔 음악을 틀어놓고 - 김이 펄펄 날 정도의 따뜻한 물을 맞으며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녀에게는 하루의 낙이었다. 샤워를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주문한 욕조가 어서 도착했으면 좋겠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작은 집의 작은 욕실이라, 욕조가 없이 샤워부스만 있었다. 그동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자, 아무래도 입욕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해가 유독 짧다고 느껴지던 어느 쌀쌀한 겨울 오후, 결국 그녀는 욕조를 주문해버렸다. 욕실 크기 때문에 커다란 욕조를 사는 것은 무리였다. 해서 고른 것은 발을 다 뻣기에는 다소 짧은 길이의 욕조이지만... 그게 뭐 어떤가 싶었다. 입욕제를 풀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시간을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몸이 노곤해지고 입꼬리가 풀어진다. 좋아, 욕조가 오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입욕을 하자. 수도세나 난방요금을 조금쯤은 더 내겠지만, 그 순간이 일상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까.
남들은 잘 모르지만 - 아니, 어쩌면 다들 알고 있을지도 - 그녀는 소심한 성격이었다. 일터(직장도 아니고 일터라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왠지 그녀답다)에서 한껏 힘을 내어서 일을 도맡아 처리하거나, 회의에서 누군가와 언쟁을 하고 나면 하루 에너지가 다 고갈되어버리는 편이었다. 그녀 딴에는 무리를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고 나면 늘 체력이 고갈된다고 느꼈다. 특히 사람들을 상대할 때면 더 그랬다. 격렬한 논쟁 또는 논리적인 설명. 질문에 즉답하지 않고 피해 가는 것. 복잡하고 모호한 것들에 대한 분석. 예의 바르게 불친절한 내용을 서한으로 전달하는 것. 그런 것들이 지금 그녀가 하는 일들이었다. 일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그녀에게 몇 가지 - 그녀가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은 -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쌈닭'이라는 별명은 그녀의 진짜 성격에는 조금 배치되는 별명이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은 덤벙대고 멍 때리고 깜빡깜빡하는 그녀 스스로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별명이었다.
짧지만 긴 샤워를 마친 후 그녀는 일리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식탁 겸 책상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디카페인을 골랐지만,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 보니 이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디카페인이라고는 하지만 카페인이 다 없어지지 않았나 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커피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커피가 그녀를 두근거리게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다른 것이 그녀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녀는 나름 정성 들여 고른 연녹색 편지지를 펼치고 - 편지지 위에는 은색 글씨로 'You are my everything'이라는, 다소 오글거리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가장 좋아하는 녹색 펜 뚜껑을 열었다. 아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닫았던 뚜껑을 다시 여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포옥- 내쉬는 것이, 쓸 말이 도통 정리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참을 편지지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던 그녀는, 어느 순간 숨을 멈추고, 몇 글자를 겨우 써 내려갔다. 'DEAR'... 통상 편지의 제일 처음을 장식하는, 어쩌면 매우 구태의연한 네 글자였다. 겨우 네 글자를 적고, 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고 싶은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대체 언제 이런 편지를 썼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야. 어쩌면 대학생 때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고등학생 때였을지도 몰라. '사랑하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편지라니... 글쎄... 이건 사랑일까? 그냥 단순한 감정의 동요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잠시 동안 기다렸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이 편지를 쓰고 나면 답을 알게 될지도 몰라...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펜을 다시 그러쥐었다. 지금의 울렁거리는 마음이 긴장감으로 전달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손의 힘을 살짝 빼고, 그러나 정성 들여 또박또박 편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성적이지만 감성적인, 다소 담담한 필체의 편지는 그녀가 그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기 위한, 그리고 그의 진심을 - 그런 것이 남아있다면 - 붙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영화의 결말이 - 이것을 영화라고 할 수 있다면 - 미국식 해피엔딩이 아닌 프랑스식 새드엔딩일지도 모른다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무실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감추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동료들에게 줄곧 연애상담을 하고는 했었기에, 그녀와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가 침울해지지 않기를, 마음이 어서 편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에게 아주 절친한 여자 친구들이 실연한 친구에게 보통 할 법한 이야기들을 한가득 쏟아부었다. 그는 너를 결국 그만큼만 좋아한 거야. 어쩌면 그는 네게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었는지도 모르지. 어찌 됐건 그는 그냥 잊어버려. 나는 그가 네 편지에 어떠한 식으로든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은 것이 매우 괘씸해. 너는 그를 잊어야 해. 그녀의 주변으로 쏟아져내리는 말을 듣다가, 그녀는 급기야 눈물을 한 방울 떨궜다. -사무실에서, 그것도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니, 그녀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완전히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기에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 비록 울기는 했지만, - 그녀는 그것을 울음으로 표현하기보다 그냥 눈물을 떨어뜨렸다 정도의 표현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 왜냐면 그녀는 그것이 감정적인 의미의 어떠한 것이 되기보다는 단순한 해프닝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말했던 것이 -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어쩌면 쉬운 것은 아니니까 - 그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로 그녀들에게, 너무 세게 때리면 저 울어요... 조금 살살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그 날 그녀는 운동을 갔다가 발을 다치고 말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꼼짝없이 누워있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애도의 시간, 어쩌면 내게도 그런 게 필요한 순간인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