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기 전 26년간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목요일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15년 전에 돌아가시고 나서, 눈물이 쏟아지도록 울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할머니가 위급하셔서 응급실에 입원하시고, 아버지로부터 의사 선생님이 임종을 준비하시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후, 아버지에게 부탁 한 가지를 하였다. 화상 전화로 할머니를 보여 달라고, 그리고 핸드폰을 할머니 귓가에 가져다 놓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오랜만에 본 할머니의 모습은 야위였고, 의식이 없었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에게 혼자서 20분간을 독백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였다. 할머니가 듣고 계시는 것이라 믿으면서.. 통화가 끝나고 나서 한 시간 후 할머니는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할머니 임종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했던 것이었다.
14년 전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바로 가족의 고통에 함께 참여할 수 없을 때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한 2주간의 격리는 비행기를 급하게 예약해서 간다고 해도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도록 만들기에, 토론토에서 혼자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며 울었다. 할머니가 했던 말들과 추억들, 할머니가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향년 91세.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인생'처럼 할머니의 인생은 부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사셨지만 굴곡진 현대사를 몸소 경험하셨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가시고, 해방 이후 살아 돌아오셨다. 당시에 한 집에서 한 명씩 잡아갔다고 하는데, 많은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할머니는 할머니의 아버지가 중매쟁이의 말을 듣고 할아버지의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시집을 가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사셨던 곳보다 훨씬 더 시골이었던 마을에 할아버지와 단둘이 초가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틈틈이 함께 채소를 다듬을 때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물어보면 시집갈 때 할아버지가 말 그대로 빈손이라서 고생을 무척 심하게 하셨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시집살이도 심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심심찮게 간첩이 내려오던 시절, 어느 날 밤에 간첩이 총을 들고방에 들어 와서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곡식들을 다 빼앗아 갔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했지만, 어린 자식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해 겨울이 무척 힘겨웠다고 했다. 빨치산 토벌 때는 같은 마을에 할아버지의 친척 되시는 분이 경찰이었는데 빨치산 토벌 때 참여해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남겨진 그 할머니는 20대부터 청상과부가 되어 자식들을 키우며 평생 사셨다. 30가구도 안 되는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각 가정마다 아픔이 없는 곳은 없었다.
50-70년대는 도시도 가난했지만 농촌도 그에 못지않게 사는 것이 힘들었던 시기였다. 6남매를 낳아 먹여 살린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일하셨다.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나이 여든이 넘어가니 연골이 다 닳아 없어져 거동이 불편하셨다.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이제 아무 걱정없이 살 때가 된 후에는, 다리가 아파 어디를 쉽게 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실 수 있으면 뜯어말려도 일하러 가셨다.
80년대 중반 내 나이 7살 때 세 번째 삼촌이 군대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돌아가셨다. 내무반에 자고 있던 수 십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중에 삼촌이 있었다. 아직도 장례식 때 슬퍼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의 고통과 곡하는 목소리와 장면은 잊히지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있다면 자식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 유공자가 되고 국립현충원에 묻혀도 할머니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매년 6월 6일은 공휴일이 아니라 슬픔의 날이었다. 대전현충원으로 가는 차에서, 기차에서, 묘비에서 흘리는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총기 난사 사건은 그 당시에만 해도 신문에 잠시 나오고 마는 사건이었다. 알게 모르게 군대에서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는 비단 할머니뿐만 아니었다. 현충원에 갈 때마다 빈 묘지는 가득 채워지고도 모자라 산을 깎아 묘지를 확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한 해에 1000여 명이 군대에서 부상당하고 죽는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평생을 일에 집착하셨던 것은 일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할아버지는 이야기 꾼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이야기할 때는 늘 듣고만 있었지만, 할머니와 함께 채소를 다듬거나 할머니를 미장원에 데려다줄 때 등 함께 있을때 내가 여러 가지를 많이 물어보면 곧잘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처녀 때 이야기, 시집살이 심하게 시켰던 큰 형님 이야기,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 50여 년을 함께 사셨던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몇 년을 허전해서 잠을 잘 자지 못했던 이야기, 엄마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며 엄마에 대한 험담 등 줄줄이 사탕처럼 평소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몇 년 전 일이었다. 한국에 갔을 때, 어머니가 할머니가 사람을 잘 기억 못 하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할머니를 모시고 보건소에 가서 치매 검사를 하였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여자는 글을 배우면 안 된다고 하셔서 할머니는 처녀 때까지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늘 글에 대한 욕심은 있어서 내가 대학생 때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쳐 드리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 포기하셨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이지만 집 주소와 전화번호, 자신의 이름과 가족들의 이름은 꼭 기억하셨다. 할머니가 글을 몰라 시장에 장만한 채소를 팔러 부산에 갈 때면 항상 사람들에게 맞게 가는 버스인지를 물어봐야 했고, 집에다 전화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부탁해야만 했다. 그렇게 평생을 혼자서 어디를 갈 때면 남에게 물어보며 사셨다.
보건소에서 할머니가 나이 들어 생기는 노환이라고 해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검사 후, 할머니에게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할매, 뭐 먹고 싶노?"
"니 먹고 싶은거 묵자."
"그래도 말해봐라."
"귀다리가 먹고 싶네."
할머니의 먹고 싶은 것은 소박했다. 미역 귀다리 철이 아니라 시장에도 없어서, 어촌 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물어봤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대, 떡볶이, 어묵, 김밥을 사들고 집에 와서 할머니와 둘이서 오붓하게 먹었다. 늘 집을 떠나 출국을 하려고 하면 할머니는 나를 보고 우셨다. 쌈지에서 용돈을 꺼내서 주려고 할 때마다 괜찮다고 했지만 내 손에다 꼭 쥐어주었다. 늘 주기만 했고, 자신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도 쓸 줄 모르는 할머니였다.
고등학교 때였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밤 10시쯤 집으로 걸어가는 산길 중간쯤에 할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때는 "할매, 뭐하러 나왔노?"라고 말했지만 임종 전 할머니에게 말하는데 그 장면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나를 걱정해서 거의 1km를 걸어서 마중 나와 계셨던 것이었다. 이 장면을 떠올리자 할머니가 나를 많이 아껴 주셨다는 생각이 그 순간에 들었다.
영화 '인생'에는 삶에 대한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는 행복한 결말이 없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안고, 시대 흐름 속에 살아가는 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눈으로 보아온 할머니의 삶은 가족들을 부양하고 사랑하기 위해 한 평생 자신의 삶을 바쳤던 90년 동안의 여정이었다. 그것이 할머니의 인생이었다.
임종 전 울면서 할머니의 귀에다 대고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할머니, 할머니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이었고, 그동안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