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노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Liebesträum
캐롤린 백작 부인과의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리스트와 자신의 아버지의 아담 리스트와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관계 속에서 리스트가 원하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담 리스트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기타를 연주할 정도로 다방면에 재능이 넘치는 음악가이자 헝가리의 왕자 니콜라스의 비서였다. 아담 리스트는 리스트가 6살 때 피아노를 가르쳤고, 그가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리스트가 9세 때 아담 리스트는 귀족들 앞에서 리스트가 연주하도록 주선했고, 이때 귀족들로부터 리스트는 스폰서를 받게 되고 베토벤의 제자 카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사사 받는다. 이후 그는 리스트의 재능을 더욱 키워주고자 니콜라스 왕자에게 긴 휴가를 요청하게 된다. 맹모삼천지교처럼 어린 아들 리스트를 데리고 비엔나로 가서 모차르트의 라이벌인 안토니오 살리에르에게 공연을 보여준다. 리스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살리에르는 무료로 그에게 작곡을 가르친다. 또한 몇 달 지난 후에는 왕과 귀족들들 앞에서 연주하도록 주선한다. 리스트가 12세 때 아담 리스트는 그를 파리 음악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파리로 가지만, 리스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절당하고 만다. 그러자 이탈리아의 유명한 작곡가 페르난도 파에르에게 리스트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리스트가 작곡한 Don Sanche는 그의 처음이자 유일한 오페라 곡이다. 리스트가 1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받은 정신적 충격은 리스트가 음악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게 만들고, 예술과 종교에 대한 책들을 탐구하고 다독하게 된다. 이때 리스트는 성직자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아버지를 잃은 리스트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의 단칸방에서 방황하면서 아이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가게 된다. 이후 1832년 파가니니의 공연을 보고, 자신도 파가니니처럼 거장이 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마침내 거장이 된다.
리스트와 자신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15세 때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조그만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옆에서 하나하나 가르치는 아버지를 보면서 리스트는 '아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를 느끼지 않았을까? 더욱이 자신의 연주에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는 그의 눈에는 피아노는 자신을 사랑받게 만드는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리스트는 더욱 열심히 연주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재산을 털어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하는 모습을 본다면 감동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렇게 자신의 성장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을 사랑받게 만드는 피아노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을 것이다. "내가 왜 연주를 해야 되지?"라는 질문을 하면서 말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피아노를 연주할 의미는 오로지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그분이 없는 삶에서 오는 허탈감과 공허함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변하지 않는 사랑, 자신의 성장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을 찾았을 것이고, 그 사랑을 하나님에게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생계만 아니었다면 그는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기 전에 사제가 되었을 것이다.
리스트의 성격에 관한 여러 글들을 읽어보면 그는 대단히 오만하고 속물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마 20대 초반부터 큰 성공을 거둔 그의 능력과 그에 따라오는 부와 명예는 그를 도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잘생긴 외모와 공연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때문에 그의 사생활은 문란하였다고 한다. 아버지처럼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절제하도록 진심 어린 조언을 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의 공허함을 돈, 명예, 여성에게서 메꾸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과 만든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아버지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캐를린 백작부인과 만나기 전까지는 한 여성에게 헌신하지 못했는데 아마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랑을 그전에 만났던 여성들에게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7년 9월 키예프(Kiev)에서 리스트는 러시아 제국 3번째 투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캐롤린 백작부인은 사업상 키예프에 왔다가 리스트의 공연에 참석한다. 그의 공연에 감명받은 그녀는 공연이 끝난 후 그와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요청했고, 그해 그녀의 딸의 10번째 생일 파티에 그를 초대하면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들은 1861년 리스트의 50번째 생일 때까지 동거를 한다. 동거를 한 이유는 캐롤린이 유부녀였기 때문이었다.
캐롤린 백작 부인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방의 대지주의 외동딸로서 러시아 제국의 왕자와 결혼을 하지만 결혼 후 딸을 낳고 몇 년 만에 별거하고 만다. 그녀는 대지주였지만, 작가로서 신앙에 대해서 책을 쓸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고, 진실함과 신실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진실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인 것 같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남편과 행복하게 살려고 했지만, 남편이 다른 여성들과 수 없이 염문을 뿌리고, 동거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허탈감과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결혼 몇 년 만에 별거를 하고 자신의 딸과 함께 둘이서 살아가게 된다. 이때 캐롤린도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찾게 된다. 그녀가 가진 무수한 재물과 지위는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기에 말이다.
고결한 신분의 소유자이며 대부호인 캐롤린이 왜 리스트를 초대했을까?라는 질문에 생각해 본다면, 아마 리스트가 작곡하고 연주한 곡들 속에서 리스트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사랑에 대한 갈망을 읽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신분이 다르고, 수많은 소문을 뿌리고 다니는 리스트를 초대해서 만남을 가졌던 것일 거라 생각한다.
Liebesträum곡은 리스트가 얼마나 캐롤린을 영혼의 동반자로서 사랑하고 있는지 잘 드러낸다. 이는 그녀와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 서로 간에 에로틱한 사랑, 성숙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에로틱한 사랑은 남녀라면 당연하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성숙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둘 모두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에게서 변하지 않는 진실한 사랑을 찾았고, 위안을 얻었다. 리스트는 1947년 캐롤린과 만난 이후에 오로지 그녀만 바라본다. 여성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리스트는 왜 그랬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리스트에게 진지하게 하나님과 신앙의 이야기를 꺼낸 여성은 캐롤린이 처음이었을 거라 추정해 본다. 리스트가 만났던 여성들 중 캐롤린만큼 사랑에 상처 받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매달린 사람이 없었을 것 같다.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그녀가 지은 엄청난 분량의 책들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의 주요 대화 주제는 분명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를 잃고 난 후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회상하게 만들고, 캐롤린과의 영적 친밀감을 더욱 확대시키며 리스트 내면에 숨겨져 있던 공허함을 채우지 않았을까?
또한 리스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과 성장시키는 사랑이었다. 리스트에게서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캐롤린에게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1947년부터 리스트는 그녀와 동거하면서 작곡가로 더 큰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캐롤린은 리스트가 작곡에 큰 잠재적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나서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작사도 하고, 수많은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꿈"도 바로 그녀와의 사랑이 절정기일 때 만든 곡이다.
결론을 이야기 하지만 리스트와 캐롤린의 사랑에 성장이 있었다. 영적으로도 서로의 잠재적 능력에서도 그들은 끊임없어 서로 사랑하면서 성장하고, 서로의 내면에 채워지지 않았던 상실감, 공허함, 허탈함을 음악과 신앙으로 채웠던 것이다.
캐롤린은 백작부인으로서 남편과 별거는 했지만 가톨릭에서 정식 이혼을 허가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 서한을 보내 이혼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는 캐롤린의 딸이 20세가 넘어가고 딸의 결혼을 위해 공식적으로 리스트와 결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과 교황청은 1861년 캐롤린의 이혼과 둘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가를 하게 된다. 그래서 리스트의 50번째 생일날 결혼식 날짜를 잡고, 로마 근교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려고 리스트는 로마로 향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캐롤린의 남편과 러시아 황제는 교황청에 압력을 가해 캐롤린과의 이혼과 리스트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결국 결혼식이 취소되고 만다. 이로 인해 캐롤린과 리스트는 가톨릭 교회에서 둘의 관계를 인정받지 못했기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캐롤린과 리스트는 헤어지게 된다. 이 후로 둘은 편지를 통해 사랑을 계속 확인하지만 못 다한 사랑에 대한 좌절 때문인지 리스트는 어릴 적 꿈인 1865년 가톨릭 사제의 서품을 받게 된다. 아마 캐롤린과 같은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캐롤린을 영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캐롤린과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 그녀에게 평생을 헌신하는 서약을 했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50번째 생일날 결혼식장이 있는 로마 근교의 교회에 가기 위해 마차로 수많은 날들을 보내며 도착했는데 결혼식이 취소되는 상황이라면 리스트의 마음은 어땠을까?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고, 함께 차를 마시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늘 곁을 지켜주었던 그 사람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을 위해 내가 가진 그 어떤 능력으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절망감, 슬픔, 비통, 그리고 앞으로 결혼하고 나서 느끼게 될 삶 속에서 안정감과 미래를 송두리째 눈 앞에서 날아가버린 그 아픔이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난 캐롤린과 리스트는 서로 만나지 못한 채 플라토닉 사랑으로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리스트가 폐렴으로 1886년에 사망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캐롤린은 그 충격으로 몇 개월 후 사망하게 된다. 아마 하늘에서 못다한 사랑을 이루었을 것이다.
또한 결혼할 수 없어서 노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서로를 너무 이해했기에 리스트가 작곡한 사랑의 꿈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캐롤린과의 사랑처럼 누군가를 영혼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프란츠 리스트가 죽기 전 Liebesträum No. 3을 들으면서 캐롤린과의 사랑을 회상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며 내가 리스트가 되어 캐롤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글 '이루지 못한 사랑의 꿈' -자료 및 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Liszt
https://en.wikipedia.org/wiki/Carolyne_zu_Sayn-Wittgenstein
https://en.wikipedia.org/wiki/Liebestr%C3%A4ume
https://en.wikipedia.org/wiki/Ferdinand_Freiligrath
https://en.wikipedia.org/wiki/O_lieb, _so_lang_du_lieben_kann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