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 시원한 바람, 그리고 아름다운 해 질 녘 노을
추운 겨울이 지나 화사한 봄꽃이 필 무렵 어느 주말, 느지막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반겨주는 따스한 햇살.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푸르른 하늘이 높아지는 어느 가을날 새벽, 머리카락을 적당히 흔들어 주는 시원한 바람. 치열하게 일을 마치고 터벅터벅 집에 돌아가는 길, 반대편 저 멀리 보이는 보랏빛도 아니고, 주황빛도 아닌 오묘한 색감을 뽐내는 아름다운 해 질 녘 노을.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한 장면은 늘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누구나 똑같이 바라보고 그들을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똑같이 바라보고 느끼진 않는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을까?
미치도록 아름다운 자연에 위로를 받은 적이 있나요?
2019년. 추운 겨울이 지나 서늘함과 따스함 그 사이 3월에 장교로 임관을 했고, 조금씩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6월에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첫 자대로 향했다. 업무는커녕 부대 인근 지명, 아니 같은 부대 사람들의 계급과 이름도 몰랐던 내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새로움'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 부대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장교에게 주어지는 책임감의 무게는 당시 내가 감당하기엔 무거웠다. 말이 좋아 스펀지였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그 새로운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인생 처음으로 번아웃이 왔다.
번아웃은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던 새로움보다 훨씬 무서웠다. 새로움은 내가 그것들을 모른다고 자각이라도 할 수 있지, 번아웃은 알아차리기도 전에 슬그머니 내게 찾아왔다. 이때 처음으로 어떤 현상 자체가 중요하기보다는 그 현상을 자각하는 게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왜 하는지 나조차도 정확히 설명이 어려운 일들을 부대원들에게 지시하는 건 더욱 하기 싫었다. 그럼에도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초록색 견장이 무엇이었는지, 차마 마지못해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은 흘러갔다.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아니 내가 힘들어하면서까지 왜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여전히 번아웃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출동 지시로 인해 근무표에 짜여진 대로 부대원들과 부대 차를 타고 늘 향하던 어느 항구로 출발했다. 항구에 도착해서는 늘 하던 대로 부대원들에게 어차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차에서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심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달랐다. 그때의 시간이 몇 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창밖을 바라봤을 때 순간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밝게 빛나는 가을 햇빛이 서해 바다에 흩뿌려져 윤슬로써 반짝이고 있었다. 바다는 청량하다 못해 푸르렀고, 윤슬은 국어시간 옛 시인들이 말하던 보석이라는 비유가 이해가 될 만큼 반짝였다. 그때 그 순간 무언가 깨달았다. 번아웃이 왔던 내 마음가짐과 함께 했던 부대원들, 타고 갔던 부대 차, 목적지였던 항구까지. 모든 것들이 늘 그랬던 대로, 어쩌면 그 아름다운 바다와 윤슬 또한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인 건 아닐까.
물론 그 순간만으로 번아웃이 해결되진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이전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행동했다. 하지만 왜 살아가야 하는지 몰랐던 당시 내게, 실낱 같은 희망을 그때 그 푸르렀던 바다와 눈이 부시게 반짝이던 윤슬이 내게 안겨주려 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이 늘 내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들을 바라보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품는 것만으로도 당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미치도록 아름다운 자연에 위로를 받았다.
결국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아름다운 자연에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고서 번아웃이 해결되진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가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상시에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늘 내 곁을 지키고 있던 무언가를 하나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 맛있는 음식,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가족, 어떤 길이든 응원해 주는 친구까지 늘 내 곁을 지키며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건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였기에 고마운 마음은 한없이 무뎌져 마침내 느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야 깨달았지만 혹자가 말했던 것처럼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어쩌면 가장 빠를 때"를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겐 그렇게 믿는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조금씩이라도 항상 내 곁을 지켜준 모든 것들에 대하여 고마운 감정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하게 지나갔을 그들의 존재를 조금 더 섬세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늘 걷던 길일지라도 어제와는 다른 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같은 길도 그날의 햇살과 공기, 함께 하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었다. 같은 패턴으로 반복해서 나오는 식당 밥도 그날의 내 기분과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졌다. 늘 형식적으로 하던 부모님과의 전화도 하루하루 진심을 다해 귀 기울이니 그들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친구면 다 똑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니 진심인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과는 조금씩 거리가 멀어졌고,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친구들과는 더욱 가까워져 함께 고민하고 같이 성장할 수 있었다.
참 신기했다. 그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오로지 내 마음가짐 하나였다. 그런데 그 한 가지가 달라졌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그 달라짐은 곧이어 내게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게 했고, 나아가 긍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현상은 늘 그대로이다. 결국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시각과 해석을 결정하는 마음가짐은 엄청난 돈과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최소한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이를 누릴 자격이 있다. 이를 누릴지 안 누릴지는 결국 우리가 선택하기에 달렸다.
배우 김혜자 님 수상소감 中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또 해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