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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렌시아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 자신이기를

by Sinclair

퀘렌시아, 투우사와 혈투를 벌이다 지친 소가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다. 그만큼 중요한 장소이기에 투우장에 들어간 소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퀘렌시아를 찾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단순히 몸을 휴식하는 것이 아니라, 지쳐 있는 마음까지 회복하여 다시금 투우사와 사투를 벌일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 수 있다. 과거 투우에 진심이었던 헤밍웨이는 퀘렌시아에 있는 소는 그 누구도 결코 쓰러뜨릴 수 없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너무나도 빠르게 세상이 변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는 게 일상인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곳이 아닐까?




처음 발견한 나만의 퀘렌시아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번아웃 비슷한 게 찾아왔다. 한창 군생활을 할 때였는데,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 자신을 갉아먹는 욕심이 되었다. 겨우 실낱 같은 정신줄을 붙잡고 일상생활을 이어나갔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으로 인해 다시 일어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고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몰랐기에 너무 답답했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펜과 종이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왜 이렇게 답답한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마음 가는 대로,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마구잡이로 쓰기 시작했던 단어와 문장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나 자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20대 중반의 나이. 학교도 졸업하고 사회생활도 2년 이상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나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 자신이 잘 몰랐기에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다시 일어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온전히 나 자신에 대한 글이었다.

이때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힘든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에너지가 넘쳐났다. 평소에 억지로 잠을 자고 일어나서 눈을 들 때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지 막막함에 눌려 한숨부터 나왔던 나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오늘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쓸까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잠을 조금 덜 자는 건 더 이상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날에 무엇을 했든 어떤 일이 있었든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는 블루투스 스피커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 앞에 앉으면 잃어버렸던 생기를 되찾는 기분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누군가 내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그때 그 순간, 모두가 잠든 새벽 5시에 옅은 스탠드 불빛 아래 글을 쓰며 설레었던 때를 말할 것이다.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여 글을 쓰는 그 순간이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나만의 퀘렌시아였던 것이다.


무엇이든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

조용한 장소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게 내 최고의 퀘렌시아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후에도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항상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방으로 들어가 음악을 틀고 노트북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그 생각에 사로잡혀 점점 더 나만의 동굴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주변에서의 걱정도 적지 않았다. 평소라면 주변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점차 동굴 깊숙이 들어가는 내 모습은 그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나만의 정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오만함으로 인해 그들이 걱정하든 말든 내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오만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왔다.

깊은 동굴 속에 있는 나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준 건 다름 아닌 친한 친구의 부름이었다. 사실 그 부름조차도 고민했지만 워낙 막역한 사이였기에 마지못해 나갔다. 하지만 마지못해 나갔다는 표현이 부끄러워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모르는 누군가가 그 순간의 나를 마주했다면 결코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누구나 오랜 친구를 만나면 하듯이 과거 이야기부터 현재 서로의 고민까지 털어놓았다. 그 시간 덕분에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내 과거의 좋은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었고,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어떤 방향으로 해결할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그 친구와의 만남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정리했다. 지쳐 있는 몸과 마음을 달래줄 나만의 퀘렌시아는 오로지 음악과 글이라고 생각했던 내 오만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퀘렌시아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장소가 될 수도 있으며, 활동, 관계 등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그 순간만큼은 생동감 있게 숨을 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퀘렌시아였던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퀘렌시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퀘렌시아는 그리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 평화로운 주말 아침 푹신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것. 포근한 날씨에 산을 오르며 복잡했던 생각을 정리하는 것.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장소로 훌쩍 여행을 떠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순수하게 대화하는 것.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실컷 이야기하는 것. 그 무엇이든 그 순간만큼은 평소 나를 괴롭히던 생각을 멈추고 온전한 나로서 그것에 집중하면 그게 바로 우리의 퀘렌시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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