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나만의 사랑을 정의할 수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 영화 제목 이외의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영화관으로 향했다. 스포일러에 대해 그리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보기 전 많은 정보를 얻는 것 또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영화라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독의 의도를 모르고 봤을 때 비로소 온전히 나 자신만의 해석이 가능하고 더욱 생각할 거리가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었다.
네가 너인 것이 약점이 될 수는 없어.
많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다름'과 '틀림'의 구분을 어려워한다. 특히나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면 그 구분은 더욱 어려워진다. 친구의 연애상담에선 객관적인 시각으로 쉽사리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본인의 연애에서 똑같은 상황이 찾아왔을 때 섣불리 그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본인과 타인을 비교했을 때 무언가 다른 부분이 있으면 '나는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늘 평이했던 학창 시절이 끝나고 20살이 되었을 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어쩌면 걱정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바로 술을 못 마시는 것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체질의 이유로 내 몸이 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20대 초반이 그렇듯 관계의 형성과 발전은 술자리에서 이뤄졌다. 관계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늘 술자리에 빠지지 않았지만, 늘 그 술자리의 마지막은 그리 달갑진 않았다. 그때 나는 그걸 결핍이고 내 약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건 결핍과 약점이 아니었단 것을. 나는 그냥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내 몸이 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아니라 '술이 내 몸에 안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을 느끼고 불안한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나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그 이해는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 자신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나아가 나 자신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타인의 다름'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우리 엄마한테도 말을 못 했는데, 네가 뭔데 그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2년 전 가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하던 때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을 찾기 위해 끝없이 고민했고, 그 고민의 답으로 전역을 결심했다. 감정적인 선택은 결코 아니었다. 그 결심의 중심엔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까지는 어려웠지만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 새로운 경험 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더욱 넓어졌고 그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바로 이 결심을 가족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최종 합격 연락을 받은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육군사관학교로부터 나와 어머니의 휴대폰으로 동시에 연락이 왔고, 우린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서로의 휴대폰이 통화 중이라고 말하는 안내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머지않아 우리의 연락은 닿았고 태어나서 처음 볼만큼 기뻐하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날의 모습이 새까맣게 잊히거나 최소한 어렴풋이 기억날 정도면 그리 죄책감을 갖지 않고 내 결심을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내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했다. 휴가를 나와 본가에 내려가 하루종일 입을 닫고 있다가 해 질 무렵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부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말했다. 부모님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껴서인지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무엇보다 무거운 입을 열어 내 결심과 그 고민의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달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 생각을 전달했는데 이야기를 끝내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거의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떨리는 눈빛으로 부모님의 얼굴을 살폈는데 내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부모님 입장에서 충분히 당황스러운 결심이었기에 걱정하셨지만, 이내 내 고민의 과정과 앞으로의 계획이 그리 가볍지 않다고 느끼셨는지 나를 이해해 주셨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이라고 표현하시면서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라면 뜻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모님의 그 응원은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을 마주할 때가 많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분명한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상황을 마주하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가까운 관계일수록 내 편이 되어 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나를 응원해 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고민과 결정을 그들에게 쉽게 털어놓고 위로와 공감을 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을 실망시킬까 두려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주저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말할 수 있어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그게 참 어렵다.
영화가 끝난 뒤에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왜 대도시의 사랑법일까? 감히 추측해 보자면 관객들에게 사랑의 다양성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나 생각한다. 대도시는 다양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규모가 큰 도시일수록 각기 다른 인종, 재산, 성격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듯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단순히 '비슷한 나이대의 성인 남자와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각기 다른 나이, 성별, 취향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존중해 주는 그 감정의 모든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