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다 좋아"라는 말의 위험한 진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제 자신을 마음이 참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둥글둥글한 성격 덕분에 학교 다닐 때부터 주변에 친구가 많았고, 친구들과 갈등을 만드는 것보다 그들에게 맞춰주며 갈등을 만들지 않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예를 들어 주말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면, 저는 늘 완벽한 휴식을 꿈꾸면서도 정작 메뉴나 장소를 정할 때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거나 다 좋아! 너희 편한 대로 해."
저는 그 말이 친구들을 배려하는 성격 좋은 사람의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취향이 확실한 친구들에게 선택권을 넘겨주고,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했죠. 피자를 먹든 떡볶이를 먹든, 제 입맛은 정말 '상관없다'라고 느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스스로를 '배려심 깊은 착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가둔 채 2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과 장교생활을 통해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깨달음을 얻은 뒤 다시 마주한 저의 "아무거나 다 좋아"라는 말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막상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하나씩 '저만의 선택'을 하려는데, 놀랍게도 저는 저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심지어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주말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으면서 항상 친구들에게 선택권을 넘겼던 건 제가 생각했던 배려가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봤을 때 이는 정확히 말하면 그냥 '취향이 딱히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진심으로 즐거운지,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입안이 행복한지 전혀 모른 채 살아왔기에 타인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것이 가장 속 편한 도피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체적인 삶이라고 하면 '소신껏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생각 또는 행동을 하는 것'이나 '거창한 꿈을 좇는 일'처럼 대단한 결단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깨달은 주체성의 첫 단추는 훨씬 사소하고 세밀한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그 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일, 내가 좋아하는 색깔과 옷의 질감을 고르는 일처럼 아주 작은 선택들이 모여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색채를 만듭니다.
취향이 뚜렷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기준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의 목소리가 없으니 밖에서 들려오는 확신에 찬 목소리들을 내 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음식, 스타일로 시작된 사소한 것들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인생, 행복과 같이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까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아무거나 다 좋아"라고 무심코 내뱉은 말은, 실상 내 인생의 핸들을 타인의 손에 쥐게 해 주겠다는 위험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저는 가장 먼저 저 자신을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총 12년 동안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될지는 배웠지만, 어떻게 하면 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결코 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당신은 당신 자신만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셨나요?
이제 본격적으로 제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흰 종이와 펜을 꺼냈습니다. 하지만 평생 함께한 나를 설명하는 단어는 고작 몇 개뿐이었습니다. 충격적이었던 '나 자신과의 소개팅'과 그 빈칸을 채워준 뜻밖의 조력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제6화. 나 자신과의 어색한 첫 소개팅 (A4 종이 한 장의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