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과의 어색한 첫 소개팅
주체적인 삶을 살기로 다짐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앞에 앉아 흰 종이 한 장을 꺼낸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주체적인 삶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고,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저만의 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흰 종이에는 제 자신에 대해서 무작정 적어 보기로 했습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 못하는지, 언제 행복하고, 언제 스트레스를 받는지... 아주 사소하고 직관적인 것들부터 적어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소개하는 자리도 아니고, 평생을 함께 해 온 제 자신에 대해 적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치 소개팅에서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질문을 던지듯, 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스스로에 대해 적는다면
자신 있게 채워나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 크지도 않은 A4 종이 한 장이었지만, 막상 그 종이를 채우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철학적이고 깊은 고민이 필요한 주제는커녕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색깔 같은 간단한 질문에도 쥐고 있던 펜 끝은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20년 넘게 매일 함께 했던 제 자신인데, 정작 한 줄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참 아이러니했습니다.
연애할 때는 여자친구가 무심코 지나치며 했던 말 한마디, 그녀가 좋아하는 취향을 하나라도 까먹지 않으려 휴대폰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두던 저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인생의 주인공인 ‘나’의 취향에 대해서는 이렇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러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스스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타인의 말 한마디, 사회의 기대에 맞춘 ‘외형’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껍데기 안에 숨어있는 ‘진짜 나’는 가장 낯선 존재였습니다. 텅 빈 종이 한 장은 제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무심했는지를 증명하는 서늘한 자각이었습니다.
종이를 꺼내어 제 자신에 대해 적기 시작한 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종이는 절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언의 압박감과 허무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묘한 설렘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좋아한다"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즉 그들의 기준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는지, "옳다"라고 믿었던 길이 사실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관성은 아니었는지 하나씩 고민하면서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빈 종이는 저에게 일종의 거울이었습니다. 주체적인 삶이란 결국 이 종이를 타인의 의견이나 목소리가 아닌, '나'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백지에 가깝지만, 이 종이를 채워가는 만큼 제 인생의 믿음은 더 단단해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빈 종이는 더 이상 제게 공허함이 아니라,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주체적인 삶의 무한한 가능성이자 그 시작점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종이는 스스로에 대해 가득 채워져 있나요? 만약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 종이에 적혀 있는 것들은 오직 여러분만의 것이 맞나요? 지금 당장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여러분 자신과의 소개팅을 해보세요. 아마 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당혹스러운 침묵을 마주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침묵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스스로를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이, 비로소 타인의 인생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는 진짜 출발점이니까요.
당신의 종이를 빈 종이로 오래 두면,
다른 누군가의 펜과 글씨로 하나 둘 채워질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채우기 벅찼던 A4 종이를 채우는 걸 도와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저의 과거를 함께 공유한 오랜 친구들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나'를 찾아가는 과거 여행을 떠나봅니다.
제7화. 잃어버린 나를 찾는 가장 빠른 방법: 과거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