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찾는 가장 빠른 방법: 과거 여행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첫걸음으로 마주한 A4 종이 한 장은 야속하게도 여전히 하얀 여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한 제 자신인데, 정작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이토록 없다니 놀랍고도 부끄러웠습니다. 당혹감을 넘어 자괴감마저 들 무렵, 이 빈 종이를 채워 줄 뜻밖의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오랜 친구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무척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단짝 친구를 시원한 에어컨 공기로 가득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10년 전,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6월 모의고사를 망쳐 우울해하던 저를 위로해 주려 야간 자율학습까지 빼먹고 피시방에 데려갔던 친구, 그 시절의 모든 흑역사를 공유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라면 저보다 제 자신을 많이 알거라 믿었고, 어떻게든 빈 종이에 한 줄이라도 채워보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이에 두고 저희는 먼지가 쌓인 채 기억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추억거리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수련회로 계곡에 놀러 가 서로를 물에 빠뜨리고 태어나서 처음이었던 서툴게 삼겹살을 구워 먹던 이야기부터, 그 시절 세상의 전부였던 짝사랑 때문에 밤새 고민하던 유치한 순간들까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런데 시답잖은 대화가 점차 깊어졌고, 어느새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친구는 생각보다 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 기억나? 그때 국어 시간마다 선생님 몰래 이런저런 글귀로 낙서하던 거. 어떤 때는 남들 다 하는 게임보다 혼자 방구석에서 끄적거리는 걸 더 좋아했잖아. 그때 선생님한테 걸릴 뻔했던 거 진짜 웃겼는데."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세상을 살아가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제 과거의 모습들이 그 친구의 입을 통해 하나씩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그때 그 시절, 무엇을 할 때 눈이 반짝였는지, 어떤 상황에서 유독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친구는 저보다 훨씬 객관적이고 선명한 렌즈로 그때의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가면을 쓰기 전, 날것 그대로의 '나 자신'을 기억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로이자 빈 종이를 채울 수 있는 단서였습니다.
그날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며칠 내내 끙끙대며 차마 채울 수 없었던 그 A4 종이 한 장을 이제는 하나씩 채워나갈 수 있겠다는 설렘으로 가득 찼습니다. 친구의 사소하지만 선명했던 기억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저의 과거 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행복하고 괴로운지 알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있는 힘껏 기억이 닿는 곳까지 과거를 떠올려 보는 일입니다. 뽀로로처럼 노는 게 제일 좋았던 코흘리개 초등학생 시절부터, 남모르게 진로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던 시절까지. 그 모든 일상의 파편 속에 '진짜 나를 구성하는 자아'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기억을 생생히 기억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약 혼자서 그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기 버거울 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보세요. 늘 주변에서 응원해 준 가족들, 함께 놀고 공부하고 성장했던 친구들, 멀리서 묵묵히 지켜봐 준 선생님. 이들이 기억하는 제 자신의 모습은, 지금 스스로를 알아가는 데 그 어떤 검사보다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혹자는 '과거를 정의하는 것은 현재'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단순히 '지나간 시간'으로 치부해 버리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면, 잊고 있던 과거의 조각들은 현재의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가장 귀중한 자산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난 김에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거나 부모님 곁에 앉아 슬쩍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어릴 때 어떤 사람이었어?
타인의 애정 어린 시선이라는 렌즈를 통해 투영된 나의 과거 속에서, 당신이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주체적 삶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조각들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저에 대한 파편들을 하나둘 모으다 보니 신기하게도 어떤 점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조각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강력한 연결고리,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정답을 알려주는 마법의 도구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제8화. 가치관은 나를 지켜주는 '마법의 도구, 나침반, 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