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까만색 연필을 꺼냈다

빈말

by 이승준

사무실 내 책상 위 연필꽂이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연필이 꽂혀있다. 가끔 뽑아야 할 일이 생기면 무심코 '오늘은 마음이 초록색이니까' 하면서 초록색 연필은 뽑아 쓴다. 정말 마음이 초록색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 연필을 뽑으면 내 마음이 그런 색이구나 하고 알아버린다.




'언제 한 번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하는 말들을 꽤 자주 듣는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과 언제 술을 마실지, 언제 밥을 먹을지 고민하며 혹시 모를 약속에 대비해 시간을 텅 비워두고는 했다. 언젠가 그 말들이 의미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하는 인사를 대신하기 위해 의례 하는 말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아직도 어린 날 이후로 나아진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내가 착해서 좋다고 했다.


기다리라고 하면 영원히 기다릴 것 같이 알기 쉬운 사람이라며, 가끔 바보 같고 멍청하다며 비웃기도 했지만 '착해서 알기 쉬운 사람.'이라는 말이 꼭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빈말의 레퍼토리를 하나 둘 알게 되면서 혹시 나만 너무 손해 보며 사는 건 아닐까 하기 시작했다. 왜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아무도 모르는 감정소비를 하는 걸까 하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빈말은 어쩌면 배려에서 오는 것들이 아닐까 하고. 그 상황에서 서로 어색하고 다치지 않게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인사 대신에 살며시 꼬리를 흐려 관계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익 싶어 하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감정을 배려하기 위해 하는 말, 어쩌면 그런 말에 끄덕이며 영원히 기다릴 것 같은 바보 같음으로 나에게 오지도 않았을 닫힌 배려심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를 좀 더 위하기로 했다.


하나의 방편으로 그 날의 마음을 연필 색으로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오늘은 마음이 노란색이니까, 하면서 작게 읊조리지만 실은 내 안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나에게 오늘 내 마음은 노란색이야, 하고 알아두라는 식으로 건네는 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가끔 빨간 연필을 꺼내는 날이면 안으로 파고드는 커다란 응어리가 진다. 그래서 빨간 연필에는 내 치아 자국이 선명하게 여기저기 남아있다.


나는 언제쯤 내 감정을 배려하기 위해 남에게 해야 할 말을 입 밖에 꺼낼 수 있을까. 이런 연필 같은 걸로 누가 좀 알아달라며 까딱거리고 얼굴에는 마음에도 없이 헤실거리며 웃음 짓는 거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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