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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May 30. 2019

작가님께 새로운
제안이 도착했습니다.

또 속는 건가?

브런치에 글 쓴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다. 그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글을 쓰고 도망가려고 했던 게 이젠 뭔가 일상의 일부가 되어서 이미 알 친구들은 다 알게 되어버린, 뭔가 공공성을 가진 공간이 되어 버렸을 정도. 그러다 보니 온갖 제안도 다 받아보았다.


입사 제안에서부터 무슨 새로운 플랫폼에 내 글을 활용하고 싶다거나 무슨무슨 일을 같이 하고 싶다거나 등등. 그 무슨무슨 일을 비롯한 수많은 새로운 제안들이 왔었는데 나에게 든 생각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체 뭘 보고 나에게 이런 황송한 제안을 주는 걸까 하는 마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뭘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제안은 뭔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제안이거나 해서 무의미한 시간이 되고는 했지만. (런칭이 무기한 연장되었다거나 뭐 음 보험 가입이라거나.)


아무튼 그날도 뭔가의 제안이 왔다. 분명히 그 메일을 봤을 시간대에 매우 졸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해놓고 날짜를 조율해가며 열심히 놀던 차였던지라 아마도 회사 회의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가 그랬을 거다. 눈을 비비면서 메일을 보는데 뭔가 마케팅 협업을 제안한다는 장문의 메일 말미에 1,000자 밖에 쓰지 못해서 남은 말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쓰여있었다.


흐음. 또 속는 중생이 될 상인가.


나는 일단 누군가에게 먼저 만나자고 말하는 걸 정말로 어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만날 일이 극히 드문데 그래서 이런 미팅 제안까지 마다한다면 나는 정말로 작은 우물 바닥에 갇힌 고양이 신세가 될 게 뻔한 인간상이다. 그런 이유로 의식적으로라도 뭔가 먼저 만나자는 제안이 오면 절대 거절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이단 교회의 스타렉스에 납치당해서 산속에 1박 2일 동안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갇히기도 하고...


아무튼 조금은 형식적인, 조금은 그래도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기쁜, 조금은 혹시 내 장기를 노리면 어쩌지? 나는 오장육부가 쓰레기인데 도움이 안 될텐데, 하는 말도 안 되는 걱정 네다섯 개 정도 들고 메일을 보내서 만날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제안 주신 분의 이름과 회사를 구글링 해보았다. 그런데 묘하게 이름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나는 어디선가 좋은 재질의 종이로 된 무언가를 받아오면 버리지 않는다. 이 미련한 습관 덕에 종이 샘플을 보러 인쇄소에 가는 대신 집에 있는 인쇄물을 하나하나 꺼내서 살펴보기도 한다. 그 정도로 종이로 된 무언가를 손에 쥐고 버리지 않는데, 그 종이 무더기 비교적 위쪽에 눈에 띄는 리플렛 하나가 있었다. 


이사 오면서 엄마가 내 종이들을 다 버려서 이 이미지로 대체하자.


카카오 크리에이터스 데이 때 내 약간의 노동력을 팔아서 받아온 무언가 들 사이에 있던 리플렛에 이 이름이 있었다. 당시 브런치 북을 심사하시던 분 중 한 명이었다. 이 시대의 에디터? 오오.... 으음 음? 뭘까. 뭘 제안하시는 걸까. 내가 브런치 북이라도 수상했나? 사람을 안 만나고 혼자 오래 집에 붙어 있으면 나와 나는 대화가 가능한데, 이럴 때 나는 제2의 나를 불러서 물어본다.


그럴 리가 없지. 아주 냉정한 제2의 나는 칼같이 답해온다. 그러면 제안 메일을 보낼 리가 없지 멍청아. 그냥 발표를 했거나 사실을 전해주겠지. 그리고 마케팅 협업 제안이라잖아. 나는 이내 수긍하고 다시 리플렛을 빤히 본다. 왓어북이라. 무슨 마케팅을 제안하는 걸까. 혹시 내 책이라도 낼...


그럴 리가 없지. 묻지도 않았는데, 아니 생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2의 냉정한 내가 칼답을 한다. 나 놈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렴. 그게 책으로 나올 만한 글인가. 양심이 좀 있어봐라. 나는 나 스스로 때려서 오목해진 명치를 쓰다듬으며 예전에 쓴 글을 읽어보았다. 잠시 후 일어나서 애꿎은 이불을 걷어차고 창을 꺼버렸다.


이불을 효과적으로 차는 법. jpg


사실 이렇게 된 건 예전에 썼던 연애담의 주인공인 전 연인이 구독을 누른 날부터(대체 어떻게 알고...)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느꼈던 부끄러움인데, (혹시 이거 보고 있으면 구독 해지 좀 해주라 제발.) 실제로 그날 이후 이불이 헤져서 새 이불을 사야 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날이 갈수록 물음표가 머리에 막 생기고 이게 열 세 개쯤 되었을 무렵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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