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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May 31. 2019

아무튼 책 마케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날짜를 잡고 내가 다니던 회사 근처로 와주신다고 해서 퇴근 시간 이후에 뵙기로 하였다. 약속 장소를 잡을 때도 나는 오라 하는 것보다 가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인데 어째서인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주는 수고에 대한 마음이 고마움이어야 할 텐데 부담으로 자리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만나기로 한 당일이 되었는데 솔직히 전날 밤 까지는 기억을 했다가 잠에서 깨고 나니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가방 하나 안 들고 회사에 털레털레 출근하여 오늘은 뭘 하고 놀면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던 차였다.


아! 오늘 미팅! 불현듯 생각이 들었던 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부랴부랴 다시 메일을 읽어보고 출판 마케팅은 뭐가 있지, 나는 뭘 할 수 있지, 무슨 이야길 하지, 어떤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난데없이 장기를 요구하면 어떡하지, 하는 또 쓸데없는 고민 백만 개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회의가 잡혔다. 월급도 안 나오는데 무슨 회의는 그렇게 많은지. 상사 하나가 회의실로 나와 동료들을 호출해 혼을 낸다. 혼이 나도 별 감흥이 없다. 뉘예 뉘예 하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퇴근 시간이 넘어가는 걸 보며 벌떡 일어났다. 그놈이 뭔 말을 하던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내가 자른 모양새가 되었는지 놀란 눈으로 보는 상사에게, 시간 되었습니다! 퇴근하시죠! 하고 회의실을 당차게 나갔다.


월급이나 주고 혼을 내든가


약속보다 조금 늦어진 나는 대표님이 기다리신다는 카페에 헐레벌떡 도착했다. 테이블에는 종이라든가 다이어리라든가 뭔가가 산만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테이블을 보다가 그제야 무슨 볼펜도 종이도 아무것도 안 챙기고 그냥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카페 굿즈라도 사 와서 펼쳐놔야 하는 긴박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에 뭔가 엄청나게 불안해졌다.


불안과는 반대로 미팅은 아주 좋았다. 내용을 축약하자면 음, 아니 축약하기 전에 일단 나는 이상한 곳에 꽂히는 경향이 큰데, 예를 들면 드라마를 보라 하면 주연이 앞에서 열연하고 있을 때 저 뒤에 엑스트라는 무슨 생각으로 서성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고 친구가 말 사진 같은 걸 보내주면 저 뒤에 있는 나무는 한 입 뜯어 먹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뭐 그런 이상한 나만의 고민에 잘 빠지는 편이다.


아무튼, 그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해 전체의 분위기와 느낌이 만들어진다. 그걸 영감이라고 부르든 야마라고 부르든 나는 그 꽂히는 지점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대표님이 내민 문서들에는 그런게 있었다. 아니 매우 많았다. 왓어북이라는 출판사에서 준비하고 있는 책들과 기획, 나와 하고 싶다는 업무 협약 내용들을 보며 어쩜 이렇게 취향을 저격하는 단어들이 늘어져 있는지.


왜 이딴 게 좋지? 하며 맨날 이해 못하겠지만 매번 좋은 걸 어째.


마케팅은 조직의 형태를 갖추고 출퇴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게 아닌 자유로운 형태의 협약 관계를 말씀하셨다. 내 먼 미래의 꿈 중 하나는 굳이 일반적인 조직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각자의 이익 창출 활동이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무언가의 형태 같은 것이었는데 어쩌면 이 일들이 나중의 방향 같은 걸 잡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대화 도중 협약 내용을 두어 번 보다가 몇몇 단어에 시선이 꽂혀 이게 왜 내가 마음에 들까 고민이 서너 번 정도 들 때쯤 사실 대답은 정해졌다. 기획하고 있다는 책들도 하나같이 재밌어 보였고, 출판사의 톤을 살린 라인업이 아닌 각 책의 개성이 살아있는 느낌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곧 회사도 그만둘 텐데 시간도 많이 남을 거고.


무엇보다도 자유와 재미, 둘 다 있을 것 같았다. 전부 하겠다고 말씀을 드릴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뭔가 꽂혀서 선뜻 따라간 선택에 얼마나 후회를 많이 했던가.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택배 상하차 하다가 차에 치여 입원했던 과거의 기억이라든가, 어딘가 끌려가서 4시간 동안 괴상한 종교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라던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이상한 단체에 정기 후원자가 되어...


내 삶은 왜 하드코어인가.


할게요! 할래요! 하는 말을 대충 열댓 번 정도 참았다. 집에 가서 누워서 생각해봐야 해. 제일 편한 자세로 한 시간만 고민을 해보자.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한 채로 다시 고민해보자. 하면서 남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대표님은 편안히 고민해보고 이렇게 기획하고 있는 책들 중에서 맡고 싶은 책들을 골라서 알려달라고 했다. 지금 기분으로는 스리랑카어-한국어 사전도 맡겠다 할 것 같았지만 잘 참았다.


아무튼 집에 돌아온 나는 편안하게 누워서 고양이 인형 귀를 만지작 거리며 하고 싶은 이유보다 안 할 이유를 찾아 답해보았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는 고민에는 뭐 여러 잔재주도 있고 도움이 조금은 되겠지 라거나, 내 재주에 비해 받는 게 너무 크진 않은가? 하다가 어차피 내 성과 대비니까 크게 상관은 없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뭐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우리 아버지의 조언 중 하나가 생각났다.


고민이 길어지면 그만하고 움직여라. 

그래서 그러기로 했다.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여쭈어보고 협약서를 등기로 주고받고. 여기까지가 내가 왓어북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사람이 된 이야기이며 나는 그렇게 책 마케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책을 마케팅해본 일은 전혀 없으므로 어떡해야 할지 막막한 감은 있었지만 '책은 텍스트 기반의 콘텐츠를 담는 매체의 하나'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었고 그렇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책도 하나의 매체라는 말이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이 책은 그러면 올드미디어!


사실 아직도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모르겟지만, (자신이 다소 부족한 작은 목소리)

내가 맡은 왓어북의 첫 책은 '매일 아침 또박또박 손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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