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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l 04. 2019

매일 아침 또박또박 손글씨

이 손으로 악필의 역사를 끝내겠다.

교정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 완성된 내지파일을 받았다. 이 페이지들이 제작되는 과정을 나도 알고 있으니 담긴 고생과 노력이 눈에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름 주관적인 평가가 반영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처음 디자인 결과물들을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쁘다!'였다.


색감도 그렇고 전체적인 디자인 요소를 차지하는 저자님의 손글씨가 아주 귀엽고 이뻤다. 쭉 훑었을 때 보이는 설명도 매우 친절했고, 원리에 대해 딱딱하게 설명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기분이어서 매우 매우 좋았다. 표지도 너무너무 귀엽고!


매일 아침이니까 아침에는 커피와 10분 글씨 연습을!


나는 설명서나 튜토리얼을 자세히 읽어보는 성격이다. 친구들과 무슨 게임을 해도 기본적인 설명부터 차근차근 다 읽어보고 작은 전자기기를 사도 설명서를 반드시 읽어보는 편이다. 거기에 들어간 디자인이나 문구의 친절함 같은 걸 발견하면 뭔가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나 같은 유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작자가 여기에도 고민을 많이 해주었겠지 하면 대접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난 이런 게 정말 좋더라.


이 책은 그런 작은 세심함이 묻어있는 책이었다. 알아듣기 쉽게 만들어주는 짤막하지만 친절한 설명이라든가 설명이 실제로 글씨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부분들, 안 좋은 예시 등 다양한 부분이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손글씨를 따라 쓰면서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마련해 준 부분도.


산으로 소풍을 떠나자! 히히히


그렇다면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 효과가 없을 리 없지. 당장 시험해보자.


나는 넘치는 의욕으로 최애 고양이 펜을 들고 문구점 다섯 군데를 돌아 겨우 산 그리드 노트를 끼고 과감히 첫발을 내딛기로 했다. 그런데 1일 차에는 연습이 아니라 글씨를 쓰면 좋은 점이나 각오 같은 게 있었고 나는 뭔가 음? 하는 기분으로 일단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리고 약간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3일 차 정도까지는 나에게 맞는 펜 고르기가 있었고 본격적인 글씨 연습은 4일 차부터 시작되었다. 내 악필의 역사를 끝내겠다는 비장한 마음가짐은 1일 차부터 순서대로 따라가야 완전하지 않을까? 하는 알 수 없는 강박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능 시험을 볼 때 마저 무슨 일이 있어도 앞 번호를 먼저 풀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약하지만 몹쓸 강박 같은 게 있다. 주로 촉각적인 것에서 기인하는데 하나는 순서, 하나는 완전함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들면 우유갑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는다고 치자. 어느 한쪽 모서리가 먼저 닿으면 알 수 없는 근질거림이 온몸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걸 해결하려면 다시 우유갑을 들어서 방금 전 내려놓은 리듬과 모서리가 닿았던 순서대로 다른 모서리를 축으로 내려놓는다. 모든 모서리를 그렇게 하고 나면 이번에는 시작하는 모서리와 진행 순서를 변경해서 내려놓는다.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 내려놓고 나면 마지막에 반드시 모든 모서리가 동일하게 바닥에 닿도록 차분히 내려놓는다.


그러게 말입니다.


쓰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막상 보면 안 이상하고 뭐... 아무튼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나는 치열한 고민 끝에 이 것에 일자를 굳이 부여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온전히 이 책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개인적인 위대한 도전에 첫 발을 내딛기로 했다.


글씨에 마음이 담겨 있다니.... 내 글씨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있던 걸까.


그렇게 내 악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교정기가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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