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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또박또박 손글씨

이 손으로 악필의 역사를 끝내겠다.

by 이승준

교정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 완성된 내지파일을 받았다. 이 페이지들이 제작되는 과정을 나도 알고 있으니 담긴 고생과 노력이 눈에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름 주관적인 평가가 반영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처음 디자인 결과물들을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쁘다!'였다.


색감도 그렇고 전체적인 디자인 요소를 차지하는 저자님의 손글씨가 아주 귀엽고 이뻤다. 쭉 훑었을 때 보이는 설명도 매우 친절했고, 원리에 대해 딱딱하게 설명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기분이어서 매우 매우 좋았다. 표지도 너무너무 귀엽고!


매일아침또박또박_표지_목업.jpg 매일 아침이니까 아침에는 커피와 10분 글씨 연습을!


나는 설명서나 튜토리얼을 자세히 읽어보는 성격이다. 친구들과 무슨 게임을 해도 기본적인 설명부터 차근차근 다 읽어보고 작은 전자기기를 사도 설명서를 반드시 읽어보는 편이다. 거기에 들어간 디자인이나 문구의 친절함 같은 걸 발견하면 뭔가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나 같은 유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작자가 여기에도 고민을 많이 해주었겠지 하면 대접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422fc5cbe9409b79295e47ec71948479_1422852010.7027.jpg 난 이런 게 정말 좋더라.


이 책은 그런 작은 세심함이 묻어있는 책이었다. 알아듣기 쉽게 만들어주는 짤막하지만 친절한 설명이라든가 설명이 실제로 글씨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부분들, 안 좋은 예시 등 다양한 부분이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손글씨를 따라 쓰면서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마련해 준 부분도.


d7.JPG 산으로 소풍을 떠나자! 히히히


그렇다면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 효과가 없을 리 없지. 당장 시험해보자.


나는 넘치는 의욕으로 최애 고양이 펜을 들고 문구점 다섯 군데를 돌아 겨우 산 그리드 노트를 끼고 과감히 첫발을 내딛기로 했다. 그런데 1일 차에는 연습이 아니라 글씨를 쓰면 좋은 점이나 각오 같은 게 있었고 나는 뭔가 음? 하는 기분으로 일단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리고 약간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3일 차 정도까지는 나에게 맞는 펜 고르기가 있었고 본격적인 글씨 연습은 4일 차부터 시작되었다. 내 악필의 역사를 끝내겠다는 비장한 마음가짐은 1일 차부터 순서대로 따라가야 완전하지 않을까? 하는 알 수 없는 강박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201253735_1280.jpg 나는 수능 시험을 볼 때 마저 무슨 일이 있어도 앞 번호를 먼저 풀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약하지만 몹쓸 강박 같은 게 있다. 주로 촉각적인 것에서 기인하는데 하나는 순서, 하나는 완전함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들면 우유갑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는다고 치자. 어느 한쪽 모서리가 먼저 닿으면 알 수 없는 근질거림이 온몸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걸 해결하려면 다시 우유갑을 들어서 방금 전 내려놓은 리듬과 모서리가 닿았던 순서대로 다른 모서리를 축으로 내려놓는다. 모든 모서리를 그렇게 하고 나면 이번에는 시작하는 모서리와 진행 순서를 변경해서 내려놓는다.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 내려놓고 나면 마지막에 반드시 모든 모서리가 동일하게 바닥에 닿도록 차분히 내려놓는다.


PreviewResize.jpg 그러게 말입니다.


쓰고 보니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막상 보면 안 이상하고 뭐... 아무튼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나는 치열한 고민 끝에 이 것에 일자를 굳이 부여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온전히 이 책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개인적인 위대한 도전에 첫 발을 내딛기로 했다.


이미지 (2).jpg 글씨에 마음이 담겨 있다니.... 내 글씨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있던 걸까.


그렇게 내 악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교정기가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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