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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l 09. 2019

악필 교정 1주 차

드디어 글씨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첫날에는 각오를 다지는 걸로 시작했다. 손글씨에는 마음이 담긴다고 했는데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약간의 자괴감으로 한 장을 넘기고 끝났다. 그래도 뭔가 펜을 잡은 김에 뭐라도 써보자 하고 끄적끄적하는데 지나가시던 아버지께서 슬쩍 보시더니 '참 글씨를 못 쓰는구나.' 하셨다.


나는 주워온 자식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글씨를 정말 잘 쓰신다. 아무리 빨리 써야 하는 상황이나 대충 써도 되는 곳이라 하더라도 글씨 한 자를 허투루 쓰시는 일이 없다. 내가 쥐고 있던 펜을 달라 하시더니 내 글씨 옆에 몇 자 적어두고 가셨다. 어렸을 때는 그걸 보고 어떻게든 흉내 내 보려고 했었지만 삐침 어느 부분만 겨우 흉내 낼뿐 나머지 글씨들은 그냥 혼돈 그 자체였다.


나에게 맞는 필기구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는 필기구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주고, 나에게 맞는 필기구를 고르는 시간이었다. 나는 원래 필기구에 욕심이 그득한 사람이다. 내가 이과였던 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우리 반에서는 때아닌 샤프 열풍이 불었었다. 하루 온종일 붙잡고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니 이왕 그럴 거 좋은 놈으로 붙잡고 있어야 손에 피로도도 덜하고 문제도 잘 풀리지 않겠냐 하는 지극히 이과적인 감성에서 비롯된 과열 경쟁이었다.


너도 나도 앞다투어 신상 샤프를 구매했고 샤프의 그립감과 무게중심, 내구성과 디자인, 색상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누구 하나가 어디서 구하기도 힘든 수입 제품이라도 사 오면 그날 주인공은 그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샤프가 아니라 샤프심을 바꿔야 할 문제였을텐데.


샤프 경쟁의 시발점이었던 에어피트 시리즈.


나는 그 당시에도 주류를 강하게 싫어하던 아이여서 역시 클래식 아니겠느냐며 연필과 칼을 들고 다녔다. 그걸 깎느라 시간이 더 걸린 건 함정이지만 그 시절에 나는 필기구에 대한 잡지식들과 기묘한 집착 같은 걸 얻게 되었었다. 남들이 진짜 안 쓰는, 그러면서 좋은 연필. 물론 나중엔 편의성에 빠져서 볼펜으로 결국 돌아섰지만 나는 아직도 연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내 사랑 파버카스텔과 스테들러. 하악


자꾸 쓰다 보니 사족으로 빠지는데, 여하튼 볼펜의 두께는 악필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선 선이 삐뚤빼뚤 하기 때문에 큰 글씨를 상대적으로 못 쓴다. 물론 작은 글씨라고 잘 쓰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래서 얇은 펜으로 작은 글씨를 쓰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큰 글씨를 쓸 때는 무조건 큰 볼펜으로 써야지.


그리고 글씨를 쓸 때 종이와 펜이 닿는 지점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젤 펜이 유리하다. 문제가 있다면 이다음 조건인데, 나는 뭔가에 집중하면 펜을 격한 속도로 돌리는 버릇이 있어서 무게와 무게중심 또한 아주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젤 펜은 잉크가 다 터져서 사방에 튀기 때문에 묘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고양이가 달린 펜을 선호한다. 그냥...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모든 조건이 안 좋아도 용서가 되어서...


뚜껑을 열면 저 고양이가 안으로 들어가요! 이게 얼마나 귀여운 지 알아요?


1주 차 후반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글씨라는 것을 써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글씨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것보다 우선 예쁘게 보이는 손글씨는 어떤 원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직관적으로 나와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설명이 주로 나와있었다.


미야옹~
예문에 고양이가 중간중간 나와있는 게 이 책의 최대 강점이라고 말하면 왠지 혼날 것 같다.


여기 나와있는 온갖 나쁜 예는 내가 다 가지고 있는 버릇 같았다. 아이고 세상에. 글씨를 빨리 쓰는 버릇도, 글씨가 기울어지고 수평이 안 맞는 버릇도, 크기도 제각각인 버릇도 모조리 내 글씨의 특징이었다. 한 편으로는 이런 걸 다 신경 쓰면 쓸 내용이 많은데 언제 다 쓰고 있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뭐 아무튼 나는 교정을 해야 하니까. 연습하다가 중간중간 지루해져서 이상한 글씨도 쓰고 하면서 연습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렁이들의 향연.


글씨를 다 쓰고 나서 이 교정기를 콘텐츠로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에 올리기로 했다. 부끄러워서 사망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이걸로 한 명이라도 이 책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는 훌륭한 간접체험이 될 테니까. 조금 더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산 그리드 노트에도 연습하면서 험난한 이 교정기의 첫 주차가 막을 내렸다.


힘들게 산 그리드 노트 칸이 너무 커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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