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페페론치노 한 그릇과
맥주 세 병에서

내가 창업을 빨리하게 된 계기

by 이승준
왜 창업을 결심했어요?


사업하면서 항상 들었던 질문이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 창업을 그렇게 빨리하려고 마음먹지는 않았었다. 2014년, 그러니까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창업을 했었는데 사실은 졸업하고 돈도 좀 모으고 사회생활하다가 서른쯤 되어서 여유 있게 창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나는 반강제 청년창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일단 그 사건이 있던 회사 이름을 패기 있게 전부 썼다가 혹시나 그 사람이 볼까 봐 쫄보의 마음으로 T사라고 하기로 했다. 정말 가고 싶던 회사였고 아웃풋이 나와 성향이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던 그런 회사였다.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안 보이는 성격이라 다른 회사는 생각도 안 했던 것 같다. 그러던 대학생활 중, 그 회사에서 반년에 15명 뽑는 교육 프로그램에 카피라이터로 선발이 되었다.

86.jpg 회사 건물이라도 슬쩍 올려보자.


정말 좋은 회사였다. 반 년 동안 정말 많은 걸 배웠다. 광고에만 매달려서 아무것도 안 보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직 못 찾은 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들어 줬다. 그렇게 만족하며 다니던 그 회사에서 단 하나이자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관리하던 직원 중 L 차장이었다.


실력이 어떤지를 떠나서 인성 자체가 매우 별로였다. 15명 동기 중에서 5명이 남자였는데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막내였고 내 팀원이었던 S는 아예 대놓고 인간적으로 무시를 당했다. 뭐 세상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주지 않았으므로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교육 마지막 날, 회식에서 사건이 터졌다.


L 차장은 우리에게 술 한 잔 사준다며 왔다.


회식이 몇 차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동기 중 누군가가 L 차장에게도 연락을 했나 보다. S가 불편할까 봐 몇몇이 눈치를 봤지만 상관없다는 말에 술 한 잔 사겠다며 어떤 여직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L 차장의 모습이 보였다. S만 없었어도 와인 먹으러 갔을 거라며 계속 툭툭 던지는 말로 S를 괴롭혔다.


결국 S는 옆 테이블 구석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울기 시작했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은데 L 차장은 같은 동기 남자 중 인턴이 확정된 친구의 유리잔에 소주 한 병을 가득 따라주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마셔' 한 마디를 붙였다. 얼굴이 씰룩씰룩하면서도 유리잔을 받아든 친구는 뭔가 고민하더니 이내 들이키기 시작했고 L 차장은 그걸 흐뭇하게 구경했다. 이게 진짜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머리에 피가 몰려서 눈앞이 어질어질한 와중에 내 앞에 그릇 하나가 툭 떨어졌다.


먹어


무슨 오돌뼈 안주에서 사이사이에 있던 페페론치노만 따로 골라 담은 그릇이었다. 아까부터 내 맞은편에서 뭘 하는지 꿈지럭꿈지럭 거리고 있었는데 같이 온 여직원이 매운 걸 못 먹는다고 해서 골라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골라 담던 그릇이었다. 그리고 그걸 다 골라내자 내 앞으로 툭 던지면서 '먹어' 한 마디 보탰다.


진심 맵게 생겼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상황 파악을 못하고 한참을 그릇을 쳐다보던 와중에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S는 벽에 붙어서 훌쩍거리고 있었고 L 차장 앞에서 소주 글라스 원샷쇼를 보여줘야 했던 동기는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 대 치고 싶다는 마음을 꾹 누른 채로 그릇을 L 차장 앞에 다시 툭 던졌다. 내가 받았던 것처럼 그대로.


차장님이 드세요.


L 차장은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했는지 나에게 허둥지둥 뭐라고 말했다. '나 이거 먹으면 너무 매워서 쇼크사 할 수 있어. 너 지금 나 죽으라고 그러는 거야?' '그러면 차장님은 저 죽이시려고 먹으라고 준 거예요?' 몇 마디 날 선 문자들이 날아들었던 것 같은데 하도 어이없는 시비여서 한 마디도 안 지고 그 말들 그대로 돌려주었다. 옆에 앉은 동기가 허벅지를 꼬집었다. 한 마디 할 때마다 더 세게 꼬집었다. 한 서너 번 꼬집히다 보니 이게 나 혼자 대들면 내 기분은 풀리겠지만 다른 친구들도 문제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없었지만 사과를 시작했다. 술이 과했던 것 같아 죄송하다고. L 차장은 분이 안 가셨는지 씩씩거리며 자기가 이 바닥 선배로써 해주는 마지막 충고라며 몇 마디를 더 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마지막 충고가 기억이 안 나는 건 역시 의미 없는 말 몇 마디였던 거 같다. 그때 그냥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사가 아무리 좋아도 그 안에 사람 한 명 한 명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구나. 이런 쓰레기도 이 회사를 다닐 수 있구나. 그것도 매우 잘.


서셰프1편13.jpg 잊을 수가 없다. 영원히 안 먹을 거임.


S는 고맙다고 말했다. 딱히 뭘 고마움 받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았던 S와 지하철에서 매우 많은 말을 했던 것 같다. 그중에 주제 하나는 창업이었다. '형님 우리 그냥 우리가 회사 하나 세울까요? 어차피 형님이나 나나 여기 들어가긴 글러먹은 거 같은데.'


s2.reutersmedia.jpg


다음날 중국집에서 짜장면 두 개에 맥주 한 병씩 마시며 이야기를 이었다. 서로 사업 계획서를 써가면서 준비해보자. 몇 년까지 기한을 두고 돈을 모아보자.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같은 팀이었던 Y가 어디냐고 물어보며 연락이 왔다. 그리고 얼마 후 급하게 들어오며 맥주 한 병을 더 시키고 옆에 앉았다.


우리 셋이서 사업 하나 합시다.


그게 작은 회사를 세우기 전에 세운 더 작은 회사, 플랜씨의 시작이었다.


1526147_245718542262300_1465850430_n.png 당시 CI. 굉장히 마음에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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