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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짝 Jun 17. 2020

할 수 있는 만큼, 적정선 찾기.

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요즘 환경에 관심이 많다. 원헬스며, 코로나 19 사태며, 6번째 대멸종 시기 등등을 생각한다. 이미 늦었다는 말이 정말 많지만 이대로 지구의 온도를 쭉쭉 올려서 그냥 빨리 죽읍시다! 라고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레타 툰베리가 백인 여자애고 속편하고 무슨 의자에 앉았고 음식을 먹으면서 일회용품을 썼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코웃음을 치기에는 인간으로서 거기까지 저열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 단위의 실천이 얼마나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지구인 전체가 한다면 영향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물론 이 문제에 기업 규제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하고 싶다. 기업이 이익을 위해서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라면, (물론 아니라는 거 다들 알지만) 그 이익이 아무짝에 쓸모 없는 세상이 하루 빨리 도래하게끔 하는게 합리적 선택은 아닐 것이다. 


사실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마도 1~2주일 정도이다. 이슈가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필요성을 느끼고 동참하기까지는 오래걸렸다. 개인 단위의 실천이 어느정도 유효한지 매우 의심했었고, 비건이 되고 싶지 않았고, 자기가 비건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동참하지 않기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꺠달았고 무엇보다 나는 바다거북을 좋아했으며, 당장 전부 고기를 끊고 일회용품 소비를 일절 하지 않고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조금 더 신경을 쓰자. 신경 쓰이는 만큼 신경을 쓰자고 생각했다. 


빨대를 쓰지 않으려는 노력은 생각보다 오래 해왔다. 그것은 내가 바다거북을 좋아한다고 말했기 떄문이었다. 그러니까 환경 보다는 내 언행의 일관성 문제였다. 하지만 전체 환경을 생각해서 소비를 줄이고 고기를 덜 먹고 일회용품을 덜 쓰고 쓰레기 배출을 줄이려고 하니 생각보다 너무 피로했다. 첫째로 짐이 많아진다. 텀블러에 물을 채우지 않으면 물을 사먹게 된다.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 준비하는 걸 깜빡 잊으면 비닐 우산을 사게 된다.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나는 너무 많은 휴지를 쓰고 키친타올을 쓰고 플라스틱을 생산하고 배달을 시켜서 종이 박스와 포장재를 낭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줄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뙤약볕에 양배추 한 통과 개들을 먹일 고기 두 근 굴소스 한 병 두반장 한 병을 짊어지고 집에 오니 성질이 팍팍 났다. 하지만 쿠팡은, 쿠팡의 노동 문제를 모른척 할 수 있는가? 나는 얼마전 쿠팡 로켓 와우 회원을 해지했다. 2900원에 혜택이 참 컸지만, 사람을 갈아서 만든 그 크나큰 혜택을 합리적 소비랍시고 누릴 수가 없었다. 


구운 치킨을 만들려고 닭을 사려는데, 동물복지 닭이라는 게 있다고 해서 그것을 사려고 했다. 어려웠다. 새로 회원가입을 해야 했고 배송료 붙으면 일반 닭보다 훨씬 비쌌다. 나는 쿠팡에서 그 닭을 배송료 무료로 쉽게 살 수 있었다. 쿠팡 노동자의 노동권. 닭의 동물권. 아니 사실은, 내가 회원가입을 하고 돈을 더 내면 되는 문제. 하지만 나는 가난한데. 


고민끝에 그냥 일반 닭을 샀다. 당연한 말인데, 100% 달성은 불가능하다. 일회용품을 덜 쓰고 식재료 배달을 줄이는 과정에선 노동력이 더 들어간다. 만일 이것이 정책이 된다면 현재의 성차별과 맞물려 여성의 가사시간은 확실하게 증가할 것이다. 남에게 무엇이 더 좋다! 라고 할 수도 없고 나 자신도 신경쓰니까 너무 힘들다. 개인의 노력은 2%에 들어간 복숭아 함유량 정도일까.


그렇지만 적정선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 보다는 복숭아 함유량만큼이라도 하는게 좋다. 고만큼 들어갔는데도 아무튼 2%는 복숭아맛이 난다. 영향이란 건 그런거라고 믿는다. 내가 처음에 페미니즘 이슈를 접했을 때 어땠더라. 얼마나 불편했었더라.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걸려서 편치 못하던 시절이 얼마나 있었더라. 이걸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기서 내가 한마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게 자연스러워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언제까지 불편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페미니스트로 사는데 나는 초반만큼 많은 에너지를 들이지는 않고 있다. 물론 싸우지. 말하고. 지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보상심리도 죄책감도 없는 그 선. 견딜 수 있을 만큼만 피로한 그 선. 


나는 환경 이슈에 대해서 실천한 지 얼마 안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사건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방침이 아직 없고 오래 고민하고 에너지 소모가 큰 게 당연하다. 여기서 아예 신경을 끄고 살기를 선택하면 그게 과연 날 편하게 해줄것인가... 는 매우 의문이다. 이래도 고민 저래도 고민이라면 나는 뭐라도 하는게 적성에 맞는다. 


좋아하는 이야기인데, 제나라의 선왕이 지나가다가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는 측은히 여겨 양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양은 불쌍하지 않은가? 소는 보았고 양은 못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양도 불쌍히 여길 수 있고 백성도 불쌍히 여길 수 있다고 맹자는 말한다. 맹자는 '내 집 노인을 노인으로 섬긴 뒤 그 마음이 남의 집 노인에까지 이르며, 내 집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한 뒤 그 마음이 남의 집 어린이에게까지 이른다면 천하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끔, 슬견설의 예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개가 모두 불쌍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와 개는 모두 같은 생명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이와 개가 똑같은 생명이니 이를 죽여도 된다면 개를 죽여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쓰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뻔히 알면서 그러지는 말아야지. 보고도 못 본 척 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다고 그렇게는 좀. 마음이 불편한 게 낫지 멍청이가 되는 건 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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