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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내 May 09. 2023

사랑이라는 초점

영화 <캐롤> 리뷰

사랑이라는 초점

영화 <캐롤> 리뷰


사랑이라는 초점

모든 게 스쳐 가듯 흐릿하던 프레임 안으로 한 여자가 들어온다. 그 순간 테레즈의 눈에 캐롤이라는 초점이 맞춰지며, 그와 그를 둘러싼 온 세상이 선명해진다. 캐롤의 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똑바로 볼 수 없게 하지만, 테레즈의 시선은 꿋꿋이 그를 담아낸다. 결국 한 손님이 말을 건 사이 테레즈는 캐롤을 놓치게 되지만, 기어코 캐롤은 그의 앞으로 다가선다. 둘 사이를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도록. 캐롤의 질문에 대답하며, 테레즈는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된다. 테레즈와 캐롤의 첫 만남 시퀀스는 영화 <캐롤>의 스포일러나 다름없다. 이 시퀀스를 통해 우리는 이들이 나눈 감정이 어떤 온도와 질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정으로 두 인물이 어떤 아픔을 겪게 될지, 그 끝에 무엇을 얻게 될지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In Therese’s frame

테레즈는 이 글의 첫 문장처럼 모든 게 흐릿한 인물이다. 사진을 좋아하지만, 무엇을 찍고 싶은지 모른다.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에게 특별한 끌림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누군가가 떠미는 대로, 이끄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그런 테레즈는 백화점 계산대에서 일하다가 딸의 장난감을 사러 온 캐롤과 만난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테레즈는 왠지 캐롤의 잔상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이후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테레즈가 챙겨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둘은 식사자리를 갖고, 그다음 만남, 다음의 다음의 만남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진다. 캐롤을 보자마자 온 시선을 빼앗겨 버렸던 그 순간처럼, 테레즈는 속절없이 캐롤에게 빠져든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기에 의사 표현도 어렵다던 테레즈는 캐롤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고, 의사 표현에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테레즈는 자신만의 흰 도화지에 밑그림을 하나씩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마치 중심이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선을 캐롤에 맞춘 순간, 모든 풍경이 선명해지던 그 순간처럼. 테레즈는 남자친구가 함께 유럽에 가자고 조를 때는 한없이 우물쭈물했지만,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캐롤의 여행 제안을 망설임 없이 수락한다. 한발 앞서 여행 중에 호텔에서 같은 방을 쓰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인물이 배제된 풍경 사진만 찍던 테레즈는 카메라에 캐롤을 담으며, 자신의 사진의 세계 또한 한층 더 확장해나간다.


In Carol’s frame

한편, 캐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갈지 밑그림을 이미 그려놓은 사람이다. 여성에게 성애적 감정을 느끼고, 여성과의 연애 경험도 있다. 또한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며 지켜야 하는 것은 딸이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다. 마치 테레즈를 처음 마주한 순간, 단번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는 것을 알아챘듯이. 그런 캐롤은 테레즈를 만나 선으로만 이뤄진 세상에 알록달록 색을 입혀나간다. 새빨간 이끌림. 초록빛 싱그런 테레즈. 어쩌면 테레즈와의 오색 빛 미래. 하지만, 그 모든 건 현재 이혼을 논의 중인 남편 허지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고 만다. 허지는 막무가내로 쳐들어간 캐롤의 집에서 마주한 테레즈를 본 순간부터, 그 둘의 관계를 의심하고 격노했다. 그는 이제 단순한 분노를 넘어 캐롤에게 가장 중요한 딸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시켜 둘이 사랑하는 관계라는 증거를 가져오도록 한다.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의 정점이 되었던 첫 관계를 가진 순간은 허지의 피고용인이 녹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역설적으로 둘의 숨통을 쥔 덫이 되고야 만다. 허지가 법원에 제출한 증거로 인해, 캐롤은 딸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캐롤은 1950년대 미국이 배경으로, 동성애 자체가 병 또는 범죄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이 증거가 세상에 알려지면, 테레즈 또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 수 있다. 결국, 캐롤은 자신뿐만 아니라 테레즈를 위해 테레즈의 곁을 떠난다. 작별 인사대신 작별의 편지만 남겨놓고. 그렇게 테레즈의 곁을 떠나 딸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던 어느 날, 캐롤은 버젓이 사회인이 되어 거리를 거니는 테레즈를 우연히 보게 된다. 테레즈는 그 사이 ‘진짜’ 어른 또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모습이다. 캐롤 덕분에 막연히 좋아하던 사진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깨달았기 때문일 터이다. 그 짧은 찰나에 자신과 사랑을 하던 시절의 테레즈와 지금의 테레즈 사이의 공백을 곱씹으며, 자신이 그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깨닫는다. 모든 순간의 테레즈. 그렇다. 테레즈가 간절했던 만큼, 캐롤도 간절히 그가 필요하다. 결국, 캐롤은 허지에게 양육권은 포기하고 정기적으로 볼 수 있는 선에서 타협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그와 동시에 더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시간을 지나, 영화 <캐롤>은 첫 번째 신으로 되돌아온다. 테레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캐롤이 건넨 용기에 재회한 그들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다. 캐롤은 이 용기를 끝까지 붙들고, 테레즈에게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 말과 함께 밀려온 수많은 감정에 휩싸인 찰나, 테레즈의 직장동료가 나타나 파티에 갈 생각이 있냐고 물으며 두 사람의 시간에 균열을 일으킨다. 마치 테레즈가 캐롤을 처음 본 순간, 그의 시야를 방해하던 수많은 행인들처럼. 그렇게 두 사람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 하지만, 테레즈는 직장동료를 따라간 파티에서 더는 이렇게 휩쓸려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둘의 첫 만남에서 캐롤을 놓친 테레즈에게 캐롤이 먼저 다가갔다면, 재회에서는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간다. 파티를 빠져나온 테레즈는 캐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수많은 사람들 속 가장 빛나는 존재, 캐롤을 찾아낸다. 마치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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