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시간을 견딘 이유
세상이 온통 하얗게 빛나던 날이었지.
구름 한 점 바람 한점 없는 창공을 함께 가르며
그가 말했어.
"저기 저 아래 강이 보이니?"
그가 가리킨 강은 흐르기를 멈춘 듯했어.
차갑게 얼었거든.
"지난밤 꿈에 말이야, 저 강의 얼음을 뚫고 피 오른
하얀 꽃을 보지 않았겠어?"
나는 그의 눈을 보며 살포시 웃었지.
"예뻤겠다. 나만큼이나"
이내 그의 눈이 반짝이더니
돌연 그가 날개를 접고 얼어붙은 강을 향해
빠르게 돌진하는 거야.
"왜 그러는데? 뭐 하는 거야? 위험하잖아."
"하하하, 놀랐어?"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안도했어.
"장난치지 마, 정말로 놀랬단 말이야."
하지만 곧 비명 소리가 들렸어.
떨어지기를 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거야.
그는 계속 추락하고 있었어.
그를 구해야 했어.
그래서 나도 날개를 접고 그를 향해 내려갔어.
속도가 붙더니 점점 더 빠르게 그에게로 향했고,
그는 나보다 더 빠르게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 위로 떨어지고 있었어.
누군가 말했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날개가 있음에도 추락할 뿐이야.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어.
마치 그러지 말라는 듯했지.
하지만,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그저 추락하는 거야.
마침내 "쿵" 하는 소리가 들렸어.
결국 그가 그리 되었구나.
눈을 감았지.
차마 볼 용기가 없었거든. 그의 마지막을.
이제는 내 차례야. 나도 그와 함께 가는 거야.
'아... 뭐지? 이 포근한 느낌은?'
누군가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앉은 듯했어.
설마 그가?
내가 눈을 떴을 땐 고요한 바람이 일었고
나는 살짝 아주 살짝 얼음 위에 부딪혔어.
나를 받쳐 안았던 하얀 깃털들이
내 주위 여기저기 춤추듯 바람에 흩날렸지.
그리고 그 깃털들이 닿는 곳마다 하얀 꽃이 피었어.
그가 꿈에서 보았다는 하얀 꽃 말이야.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지켰던 거야.
사람들은 그 꽃을 '황새냉이꽃'이라 부른단다.
'사무치는 그리움', '그대에게 바친다.'
전해지는 이야기만큼이나 꽃말도 참 애틋하다.
동글동글 작은 잎이 쪼르르 달려있는 모양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유독 귀여웠던 녀석이다.
얘는 뭘까? 때때로 궁금하긴 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뒤돌아서면 잊었다.
삼복더위 지나 9월로 접어든 지 제법 되었음에도 여전히 더웠고, 도장 찍기라도 하는 양 매일 비가 왔다. 그날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아파트 고양이들의 일용할 양식을 챙기던 참이었다. 고양이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주변을 서성이다 이 친구가 눈에 띈 까닭은 녀석이 자리한 곳이 생명을 꿈꾸기에 썩 마땅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마련된 곳, 낡은 초록색 인조 매트 위에 그림책 속에서나 볼 법한 귀여운 녀석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제법 모양을 갖춰 살아내는 중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녀석은 논두렁처럼 습한 곳을 좋아한단다. 그러니까 아마도 계속된 비에 축축하게 젖은 인조매트가 습지인가 싶었나 보다.
그런데, 이 가을에 웬 냉이?
시절이 수상하여 얘가 때를 헷갈려 봄인 줄 알았을까?
그럴 리가, 이 녀석은 늦가을에 싹을 틔워 봄에 꽃을 피운다. 아마도 겨울 끝자락 2월 무렵에 먹는 냉이가 욘석이지 않을까 싶다.
필요에 따라 스스로 자세를 바꿀 수 없기에 잎을 둥글고 납작하게(로제트 형태) 펼쳐 뿌리 위 땅을 덮고 하늘을 한껏 바라고 누워, 빛조차 가난한 겨울, 귀한 태양볕을 놓치지 않고 받아내 차곡차곡 땅속 뿌리에 태양의 힘을 모은다. 그리하여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날도 견디고, 그 눈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찬기운 뿜어내도 죽지 않고 겨울을 살아낸다. 그래서 황새냉이의 굵고 튼실한 뿌리는 산삼만큼이나 보약이라지.
전해지는 이야기의 계절이 겨울인 것이 절묘하다.
정말로 얼음을 뚫고 나온 꽃이로구나.
봄볕 따스한 좋은 세상을 만나 꽃 피울 무렵이 되면, 긴긴 겨울을 견디게 해 주었으나 이제는 쓸모를 다한 뿌리 위의 납작한 로제트 형태의 잎은 시든다. 대신에 줄기를 하늘 높이(10cm~40cm 정도) 곧추 세운채 가지를 뻗어낸다. 4월에서 6월 사이 작고 하얀 꽃이 피면 황새냉이의 삶은 절정을 맞이한다. 이제 곧 자신을 꼭 닮은 자식들이 세상 곳곳을 누빌 테다.
옛날 농부들은 이 꽃을 시계추 삼아 일 년 농사를 준비했단다. 쌀알 만한 하얀 꽃들이 논두렁 여기저기 피어나면 볍씨를 물에 담가 모판을 준비할 때로 여겼다고 한다. 황새냉이 역시 농부들의 힘을 빌어 2세를 퍼트렸다. 꽃이 시들고 황새 다리를 닮은 기다란 열매가 곧게 자라 잘 여물면, 스스로 그 껍질을 팝! 터트려 여기저기 좁쌀보다 작은 씨앗을 힘껏 튕겨낸다. 그때가 바로 농부들이 본격적인 논밭갈이를 시작하기 전이라니 참으로 영리하다.
더러 두 해를 살기도 하지만 대부분 늦가을에 싹을 틔워 늦봄에 제 할 일을 끝내는 한 해를 산다.
제 자식들 무사히 떠나보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한다. 한해살이가 아쉽지 않다. 시렸던 겨울이 꿈같다.
덧붙이는 글
일부러 식물 사진은 여러 장 싣지 않습니다.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좋아, 누구든 "황새냉이" 검색만 해도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굳이 이 글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아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전국 어디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천 근처라면 더 많이 볼 수도 있지요.
산책하는 길, 잠시 시간 내어 살펴보세요.
"나 여깄어!" 하고 황새냉이가 반가워할 거예요.
#풀친구 #잡초 #황새냉이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