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거잖아

내 친구 까마중

by 이경아

한 눈 팔지 않았어. 단언컨대 열심히 살았어.

언감생심 욕심부린 적도 없다니까.

너도 알잖아.

하필 돌틈에서 태어나

손바닥만 한 볕조각조차 여의치 않았지만

숨 막히는 여름에도 쉬지 않고

그 틈을 비집고 자라 마침내

다른 풀들보다 높아지게 되었고,

비 많은 가을이라도

투덜대지 않고 열매를 맺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거의 다 왔는데,

아... 참... 세상 거시기하다.


꽃자루가 한데 모여 작은 꽃다발을 이룬 하얀 꽃.

새끼손톱만 한 흰꽃은 별을 닮아 꽤 화려했다.

사랑을 들켜 수줍었을까? 꽃은 고개를 숙였다.

"아니... 너... 수줍었던 게 아니었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섯 갈래로 깊게 파인 백색의 화관을 멋 부리듯 뒤로 젖혀 올려, 자신의 사랑을 한껏 자랑하던 참이었다. 뒤로 젖힌 꽃잎 덕에 샛노란 암술대와 한데 뒤엉켜 붙은 다섯 개의 노란 수술이 도드라졌던 것이다. 이미 꽃 진 자리에는 뜨거운 사랑의 결실인 초록색 열매가 달렸다. 열매가 달린 것을 보았으니 까맣게 익어가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꿈을 이룬 친구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려 했다. 그래서 며칠에 한 번씩은 그를 찾았다.

블록 쪽으로 빗겨 자란 까마중, 초록 열매가 귀엽다

이 친구의 이름은 까마중이다.

초록색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반질반질 윤이 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스님의 머리와 닮았다고 까마중이란다. 까만 열매가 용의 눈과 같다고 "용안초"라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까까머리 동자승을 닮은 까마중이 용안초라는 이름보다 더 재밌고 친근하다. 우리 조상들의 작명 센스가 끝내준다.


10월 20일, 그를 다시 찾았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전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알이 굵어진 열매는 까맣게 익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누가 그랬을까?

아파트 주민들 오가는 블록 쪽으로 긴 줄기를 뻗어 삶을 꾸린 것이 화근이었을까? 빽빽한 풀들을 피해 조금 한적한 곳으로 손을 뻗었을 뿐인데. 그게 욕심이었나 보다. 굵은 줄기의 밑동이 팍 꺾였다.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한 서글픈 하얀 꽃과 까맣게 영글기를 기다리는 푸른 열매들은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쳐졌다. 쓰러진 줄기를 붙잡아 몇 번이고 세워주려 했다. 그렇지만 아직 끊기지 않은 섬유질만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은 버거운가 보다. 차가운 블록 위에 축 늘어진 그의 모습이 처연했다.


녀석의 하소연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 못 했느냐 따지는 것 같았다.


돌아서는 길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 풀이잖아.

많이도 아니고 딱 한 해를 사는 풀 말이야.

그 누구도 너를 아끼고 가꿔 준 적 없었잖아.

너의 힘으로 너의 깡으로 살아냈던 거야.

별별 수모 다 겪어봤을 거 아냐.

그러니 살아 봐.


그날 이후 매일 까마중에게 갔다.

혹시 살아날지도 몰라.

벌떡 일어 설 지도 몰라.

그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하지만

나의 바람 따윈 상관없는 그는 나날이 말라갔다.

탱글탱글했던 열매는 쪼그라들어 거무튀튀해졌다.

어쩌면 그를 그린 그림이 그의 영정이 되겠구나.

목전에 두고 꺾여버린 꿈이라니 허탈했다.

<코튼지 위에 연필과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까마중>

엄마는 예순 넘긴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야간 발작성 적색 소뇨증'이라는 희귀 난치병과 죽는 날까지 함께 했어야 했다. 적혈구가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 병이다. 혈액 관련한 희귀병이라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수혈을 받아야 했으며 면역력도 약해 다양한 합병증으로 수시로 입원을 하셨다. 그런데도 엄마는 한 달 30만 원 조금 넘게 받는 '독거노인 방문 봉사 활동'을 계속하셨다. 일주일에 3번, 매 3시간 정도 홀로 사는 노인의 집을 방문해 말벗도 하고 사는 모습도 살피는 활동인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하셨으니 거의 20년 정도 하셨나 보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도 그 느린 걸음으로 일을 거르지 않으셨다. 오전에 수혈받으시고 오후에 나가시기도 하셨다. 그날도 그랬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가신 곳이 그곳이었다.

"엄마, 그 일 그만 두시라고 했잖아요. 그러다 큰 일 난다고요." 고대광실 아니고 헤프게 돈 쓸 수 있는 여유까지는 아니지만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하는 딱한 처지도 아니다. 짜증스러웠다. 몇 푼 받지도 못할 일에 그렇게나 고집 피우시는지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엄마에게 독하게 따져 물었다. 팔십 다 돼 가는 노인의 고집에 대해.


"내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죽는 날만 기다리는 거라서 그래."


"헉" 말 문이 막혔다.

동갑내기 엄마 먼저 가시고 홀로 팔순을 맞아야 했던 아빠는 일주일에 3번 나가는 노인 일자리 덕에 엄마 없는 삶을 바삐 지내신다. 나 역시 '그 일 그만두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일의 의미가 30만 원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쯤이면 죽었겠구나.

그를 그렸으니 친구로서 의리는 지킨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있는 쪽으로 걸음 하지 않았다.

엊그제 그러니까 그가 꺾인 지 보름이나 지나서야 거기로 향했다. "허허... 너 미쳤구나."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벌떡 일어선 것은 아니다. 줄기는 아예 물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쪼그라든 잎은 곧 바스러질 것 같았다. 열매는 자세히 살펴야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꺾인 줄기의 밑동, 뿌리와 아직은 한 몸인 부분에서 부지런히 아주 작은 잎을 올리는 중이었다.


꽃을 피우든 말든,

열매를 맺든 말든,

또 그 열매가 먹음직하게 익어

누군가 먹고 씨를 뱉어 퍼뜨리든 말든

상관없이 그는 딱 한 해를 살아낸다.

꺾였던 시절이 봄 볕 아래였더라면,

아니 뜨겁더라도 여름이었더라면

그의 몸부림이 의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매일매일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금

용을 쓰는 그가 애달펐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까마중 작은 잎을 올리는 중이다>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 "내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죽는 날만 기다리는 거라서 그래."라고 하셨던 엄마의 주름진 목소리가 귓전에 여울지더니 이내 가슴으로 흘렀다.


그랬구나, 너도 그런 거였구나.

아직은 숨을 쉬고 있으니

그로써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거구나.


그래서

그를 다시 응원하기로 했다.

성공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잎 한 잎 죽어라 밀어 올리는

산 자의 애씀을 응원할 뿐이다.


그래, 내가 따스한 시선으로 너의 수고를 지켜보마.

<호이 마을 들쥐 형제들도 함께 안타까워하고 있다, 연필과 수채화물감>

건조해진 날씨 탓에 고질병인 안구 건조증이 심해졌다. 안과에 가는 길, 또 다른 까마중을 보았다.

하얀 화관 중앙에 콕 박힌 암술과 수술이 별처럼 반짝이고, 반질반질 여물기를 기다리는 푸른 열매가

발랄하게 대롱거리는 까마중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이다, 너는 무탈해서. 부디 검보랏빛 꿈에 다다를 수 있기를...."


그리고,

나 또한 산 자로써 내딛는 걸음을 주저하지 않으리라,

계속 가 보리라

내 친구 까마중과 약속했다.

<내 친구 까마중이 이루고 싶었을 꿈, 연필과 수채화물감>



<맛있다고 함부로 먹지 마세요! 연필과 수채화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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