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면 그래서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거든. 애초부터 공평치 않다는 것도 부조리한 것 투성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맞서 싸우는 것 대신에 싸우지 않고 지키는 쪽을 택했어. 싸워 봤자 산산이 부서지는 쪽은 결국 나일 테니까. 그렇다고 전혀 맞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모두가 살기를 꺼려하는 곳에 자리 잡고 높게 줄기를 세울 생각도 없이 보일 듯 말 듯 하지만 단단하게 살고 있지. 나의 과거를 닮은 미래를 품은 열매를 꽁꽁 숨긴 채로. 열매가 익어 단단해지면 그 씨앗 역시 멀리 보내지 않을 거야. 내가 살아낸 자리 그곳 땅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숨을 고를 거야. 얼마 안 있어 이곳의 볼썽사납게 말라비틀어진 누런 풀들은 말끔하게 베어 없어지겠지. 그래, 봄이 오면 모두가 새로 시작하는 거야. 땅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나의 미래들 역시. 때가 좋지 않으면 그다음 해라도 괜찮아. 거대한 힘과 맞서 싸울 능력은 없지만 좋은 때를 기다릴 수는 있거든. 맞아. 나도 알아. 내가 혁명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대신에 파수꾼이 될 거야. 꽃과 열매를 감추어 품는 파수꾼이 되어 나의 미래를 꼭 지켜낼 거야.
이 여정의 시작은 그였다.
우리 동네 풀 친구를 찾아 나서게 된 것 말이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이름이나 좀 알아보자 하는 정도였으니까. 어떤 이는 이름 없는 풀들이라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잡초라면......' 무책임하게 끄덕였었는데 참 부끄럽게도 나의 무지였더라. 모두들 이름이 있었다. 몇몇 풀의 이름을 알게 되자 재미가 붙었다. 그래서 틈 날 때마다 아파트 화단을 돌며 살폈다. 그때 만났던 풀이다. 자귀나무 잎을 떠올리게 하는 풀잎이었는데 얇고 길쭉한 잎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기에 달린 모습은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될까? 안될까?' 잎을 떼며 점을 치던 풀을 닮았다. 화단의 경계를 걸치고 넘어 구석지고 그늘진 곳에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자리 잡은 그를 살피려고 쪼그려 앉았다. 손대면 잎을 접는 미모사인가 싶었는데 그것은 아니었다. 만져도 보고 살짝 비비어도 봤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쉽네.' 일어나면서 무심코 잎을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양 옆으로 어긋나게 달린 잎의 뒤쪽을 보게 되었다. 이상한 것이 쪼르르 달렸다. 팥알보다 작고 좁쌀보다는 큰 것이 실에 꿰어 목걸이 만들며 놀던 구슬 같았다. 그 생김이 어찌나 재밌고 예쁘던지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주저앉아 사진을 찍었다. 얘는 대체 누굴까? 여기저기 물었다. 누구는 '여우구슬'이라고 했다가 또 누구는 '여우주머니'라고 했다. 그 방면으로는 앎이 초라한 나는 그저 이름이 두 개네 했다. 집으로 돌아와 도감을 펼쳤다. 어, 이상하다. 둘 다 있다. 둘 다 대극과의 식물이기는 하지만 따로 구분해 놓은 것을 보니 다른 풀인가 본데 아무리 살펴도 내가 본 풀이 여우구슬인지 여우주머니인지 도통 모르겠다. 한숨이 나왔다.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오기가 발동해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연필을 쥐고 노트 위에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잎의 생김, 열매의 생김 등을. 그리고 마침내 알아내고야 말았다. 내가 보았던 풀은 '여우주머니'였다. 어렵사리 알아내고 보니 내가 참 대견스러웠다. 이럴 때 남편과 아들은 나의 제물이다. 그들은 '여우주머니'와 '여우구슬'이라는 풀을 들어 본 적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이 둘을 구별 짓는 점이 무엇인지, 우리 동네에 이렇게나 대단한 풀이 산다는 등의 설명을 저녁 내내 그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들어야 했다. 시간으로 길들인 탓일까? '여우주머니'가 달리 보였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리여리한 잎의 생김이며 그 뒤에 숨겨 놓은 열매까지 모든 것이 특별했다. 그때 친구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풀친구, 우리 동네 풀친구.
그러니까 '여우주머니'는 나의 첫 풀친구다.
지난가을 나와 친구 맺은 풀을 꼽으면 스물이 넘는다. 그들 중 여우주머니는 가장 일찍 한해살이로서의 삶을 끝냈다. 필연인 파국 앞에 무의미한 몸짓일지라도 아직 끝은 아니야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까마중보다도 서둘러 흔적을 지웠다. 약한 것도 사무치는데 찬서리까지 맞으려니 서러웠을까? 달아오른 가을의 석양만큼이나 붉게 물든 잎을 하나 둘 떨구더니 대롱대롱 달렸던 작은 열매마저 드물게 흔들렸다. 그러다 어느 날엔 풀 먹여 빳빳한 명주실 같은 마른 줄기로만 제 있었던 자리를 표하더니 그것마저 바스러졌다. 초라했다. 넓은 화단의 양지바르고 좋은 곳 놔두고 모퉁이 경계에 매달려 길바닥 신세를 간신히 면했던 풀의 처연한 끝이 씁쓸했다.
새해가 밝았다. 여전히 겨울이라 춥고 서늘하다. 그렇지만 새해는 언제나 봄을 그리게 한다. 이제 겨우 12월 한 달 지났고 1월과 2월 매서운 추위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겨울 끝 곧 봄일 것만 같다. 봄빛이 돌면 여우주머니의 여린 싹을 보게 되려나? 그가 머물렀던 곳을 찾았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겨울을 견디는 몇몇 풀들을 제외하면 그곳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누렇게 변해 쌓인 솔잎과 베어진 풀들의 잔해가 널브러졌다. 봄이 되면 그곳은 어김없이 강한 식물로 붐빌 것이다. 괭이밥과 뒤엉켰던 여우주머니는 올봄에도 뒷방 신세를 자처하겠지.
나 살자고 뒤집는 세상이 모두에게 선은 아닐 거야
그렇게 뒤집으면 또 누군가 그리 하겠지
돼먹지 못한 세상이라도 파괴되어 한 줌 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지켜야 할 이가 있다면 말이야.
급살 맞을 세상이라 퍼붓던 저주도
만약 그가 있다면
그리 될까 거두기 마련이지.
피비를 지키기 위해 돌이켰던 홀든처럼.
오해였나 보다. 그를 약골이라 여겼던 것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여우주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개체가 아닌 종의 삶으로 그려 보면 반항하던 때도 있었으리라. 좋은 자리를 왜 모를까. 부딪혀 보니 태산이라, 자칫 모두를 잃겠구나 했겠지. 그런 무모함 대신 몹쓸 땅을 낙원으로 일궈 자자손손 번영케 하리라 했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버거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얇은 잎 뒤에 꽁꽁 숨겨 지켰나 보다. 그리고 그 씨앗을 제 옆에 두어 대를 이어 일궜던 자리를 보전케 하는구나. 저 땅속에 얼마나 많은 그의 씨앗들이 있을까? 그의 삶은 결코 변방으로 밀린 실패가 아니었구나.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물러설 줄 알았고 당하기 전에 숨겨 키울 줄을 알았던 것이다. 곳을 정할 수는 없으나 때를 가릴 줄 아는 그의 씨앗이 한바탕 신명 나는 삶을 꾸릴 것을 너무도 잘 알아 그가 까마중보다 빠르게 저물 수 있었나 보다.
흠뻑 젖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모진 땅이라 불리는 그곳이라도
내가 남긴 나의 미래가 분명히 살아 있었으므로.
덧붙이는 글 : 처음 친구 맺었던 여우주머니의 소개를 끝으로 '나의 풀친구' 첫 번째 책을 마무리합니다.
아직 소개해야 할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하렵니다. 더 많이 살피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생각을 더해 소개하겠습니다. 매 회마다 긴 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동네 #풀친구 #여우주머니 #수채화일러스트 #호밀밭의파수꾼 #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