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삶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 책에 있을 텐데?"
풀꽃도감의 색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얼마 전 친구 맺은 풀을 찾는 중이다.
"찾았다." 페이지를 확인하고 책장을 넘기려던 순간 휘리릭 하고 날렸다. “뭐지?" 하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집어 들었다. "아, 이거, 잘 말랐네."
'쑥부쟁이'의 미련을 외면할 수 없어 자주 찾았던 곳이다. 쑥부쟁이 군락과 경계를 같이 한 그들이었지만 한 번도 내 시야에 잡힌 적 없었다. 제법 큰 왕국이었음에도 차원을 달리해 존재했던 것 마냥 보이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쑥부쟁이를 살피기 위해 풀숲 안쪽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밟히면 아플 거야. 그러니 조심해야 해. ‘행여라도 풀이 다칠까 발 밑의 풀을 살피며 찬찬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 동심 가득한 키 작은 풀잎이 반짝였다. 쑥부쟁이에게 가려던 걸음을 거두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꽁꽁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기뻤다. 시작과 끝을 살포시 겹쳐 안은 동그란 잎은 한낮의 빛으로 찰랑거렸다. 왜일까? 풀잎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살피니 얕게 갈라진 다섯 갈래의 잎 가장자리에 작은 톱니가 보였다. 뭉툭한 톱니 끝을 따라 햇빛이 또르르 굴렀다. 잎 하나에 줄기 하나, 잎에서 시작된 줄기인지 줄기 끝에 달린 잎인지 알 수 없지만, 곧게 땅을 딛고 선 줄기가 접시 같은 잎을 받쳤다. 릴리퍼트의 소인만큼 작아진 호빗들이 투명망토를 빌려 입고 접시 돌리기를 하며 한바탕 노는 것 같다. 몇 개의 잎만으로도 충분히 그랬는데 풀을 살피느라 바닥 가까이 숙였던 고개를 든 순간 "와아~ 이럴 수가? 언제부터였던 거야?" 눈앞에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제야 비로소 왕국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오후 한 시의 빛 때문이었을까? 풀잎들은 깔아 놓은 비단처럼 반짝였다. 온통 그 풀이다.
그것은 에메랄드빛 마법이었다.
돌아가야 한다. 그들을 두고 가야 하는 아쉬움에 몇 개의 잎을 따 왔다. “큰피막이풀" 옛사람들은 피막이 풀을 짓이겨 상처에 발라 흐르는 피를 그치게 했다지만, 피막이 풀이 막아준 것은 흐르는 피만은 아니었다. 빽빽하게 무리 지어 사는 습성 탓에 토양 수분이 마르는 것을 막아 적절한 습도를 유지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물가에서도 잘 자라 물을 맑게 해주기도 한다니 여러모로 이쁘다. 따 온 풀잎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는 천 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꺼운 '풀꽃도감' 책장 사이에 끼웠더랬다. 주워 든 마른 풀잎은 그 모습 그대로다. 잘 말랐네. 그들은 지금도 반짝이고 있을까? 제법 쌀쌀해졌으니 그때만 못하겠지? 아마 풀 죽었을 거야. 차르르 윤이나는 풀밭과 차가운 날씨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그래도 혹시... 가 볼까?
그래서 나섰다. 기대는 없었다. 스러져 가는 모습을 보면 밀려드는 슬픔에 아찔하겠지만 설익은 우정의 아쉬움이랄까?
꽃잎은 물론이고 누렇게 뜬 줄기잎마저 떨구기에 열중인 쑥부쟁이가 그들보다 먼저 나를 맞았다. 영 볼품없게 된 쑥부쟁이처럼 그들도 그렇겠지. 확신했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그들 앞에 섰다. 설마! 쑥부쟁이 군락과 정반대의 모습이라니. 아니, 차라리 '저 푸른 초원'이었다. 오후 네 시의 빛이 그들 위를 비껴 스쳤다. 사선으로 들이치는 빛을 받아낸 동그란 풀잎은 그 빛을 잘게 쪼개어 허공으로 되쏘았다. 샛별 파편이 튕기듯 일렁이는 초록빛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알라딘 램프의 지니가 램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내 다리가 흐느적거리며 아득해졌다.
눈을 떴을 땐 수많은 연두색 기둥이 나를 에워싼 채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지?"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살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 하늘 대신 초록 지붕이다. 겹쳐진 풀잎 사이로 옅은 빛이 스몄다. 그때 누군가 내 발 밑 근처 어딘가에서 부스럭부스럭 흙을 퍼 올리며 소리쳤다.
"이봐, 거기! 구멍을 막고 서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나 말이야? 내가 구멍을 막았다고? 무슨 구멍?"
"어서 비키라니까, 거 참 말을 못 알아듣네."
가뜩이나 이 상황이 난처한데 생판 모르는 이의 고약한 말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친구네."
내 발을 비껴 불쑥 솟아오른 그의 머리가 보였다.
"친구라고? 너는 개미잖아."
그가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그렇지, 개미. 그게 뭐?"
지금껏 주변만 살피던 나는 처음으로 나의 몸을 훑어보았다.
"아악!"
"왜 저럴까? 쯧쯧, 요즘 개미들이란... "
"어쩌지, 내가 왜? 내가 개미?"
당황한 나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안테나처럼 삐죽 솟은 더듬이가 잡혔다.
"이봐! 친구, 이곳은 처음인가 봐?"
"응"
거짓말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날 따라와. 여기는 아주 끝내주는 곳이거든. 오갈 데 없는 가여운 친구 하나쯤 받아주는 것은 일도 아니야. 늘 풍요로운, 영원한 천국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개미로 살아야 한다니 믿을 수 없다. 그래도 내가 있는 이곳이 천국 같은 곳이고, 날 받아주겠노라 큰소리치는 친구도 생겼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보다.
그를 따라 걸었다. 입꼬리가 턱을 타고 넘어 더듬이까지 닿을 것 같은 그는 신이 나서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대부분 이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자랑하는 말이었다. 그의 말로는 이곳은 큰피막이풀 숲 속이다. 좀 전까지 내가 감탄하며 보았던 그 풀 아래다.
풀밭 바깥에서 짐작했던 것처럼 이곳은 별천지 왕국 같은 곳이었다. 개미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더러 풀 줄기에 기대어 쉬는 개미도 보였다. 어떤 개미들은 피막이 풀의 얽힌 줄기가 무빙 워크라도 되는 것처럼 줄기를 타고 스르륵 이곳에서 저곳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줄기의 마디에는 아주 작은 깡충거미가 가느다란 실로 거미줄을 치고 둥글게 말린 어린잎 틈에 숨어 여유롭게 먹잇감을 기다렸다. 최근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무당벌레도 여기저기 흔했다. 뿐만 아니라 잎을 갉아먹는 나비 유충과 무당벌레 유충도 있었다. 풀 줄기 아래 흙은 제법 축축했는데 빽빽한 피막이풀잎 덕택이었나 보다. 흙을 헤집으며 땅속과 땅 위를 꿈틀꿈틀 오가는 지렁이의 표정도 느긋하다. 저기 저 풀잎 위 달팽이가 느릿느릿 움직인다. 이제 막 식사를 끝낸 모양이다.
"굉장해. 피막이 풀 말이야, 너희들이 키우는 풀이니?"
여전히 내 옆에서 으스대기에 바쁜 개미에게 물었다.
"하하하. 누가 누굴 키운다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모두들 피막이 풀을 뜯어먹거나 이용하면서 살고 있잖아. "
피막이 풀의 열매를 물고 줄지어 가는 개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이가 없네. 친구, 공생이라는 말을 들어는 봤나?"
그가 뒷다리에 힘을 빡 주고 몸을 곧추 세우더니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더듬이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내 앞을 바쁘게 오갔다. 마치 어리석은 제자에게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까? 깊은 고뇌에 빠진 스승의 모습 같았다. 이윽고, 그가 사뭇 진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첫 시작은 우연이었을 거야. 어느 날 이곳에 피막이 풀 씨앗 몇 개가 떨어졌던 게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어찌 되었든 때가 좋았나 봐. 싹이 났어. 자신을 지켜 줄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태로 말이지. 튼튼한 줄기도 없었고, 뿌리가 깊지도 않았어. 어쩌면, 실처럼 가는 뿌리로 흙을 더듬어 붙잡을 곳을 찾아 헤맸을 거야. 게다가 높게 자랄 생각도 없어. 딱하기도 하지. 독한 냄새나 독한 맛도 없었으니 누군가 싹둑 잘라먹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런 그가 참 부지런히 움직이더라. 망설임 없이 줄기를 뻗으며 땅을 기었어. 줄기의 마디가 땅에 닿을 때마다 그곳에 새로운 뿌리가 내렸고 새 잎과 줄기가 올라왔지. 그렇게 거침없이 마침내 땅을 정복했어. 물론, 우리도 도왔어. 이를테면 고인 물에 잠긴 줄기가 썩을까 봐 열심히 땅을 뒤집어 골라주었지. 그들의 왕국이 넓고 견고해질수록 우리의 삶도 나아질 테니까. 그들이 만들어 주는 파란 그늘 때문에 뜨거운 여름도 견딜만하고,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아서 한 겨울 서러운 추위를 막아주는 따스한 지붕 노릇도 해주고 말이야. 키 작은 그들로 빽빽한 이곳은 키 큰 풀이 살기에 썩 좋지는 않아. 그래서 보다시피 우리 같은 작은 생명들의 천국이지. 우리는 흙을 뒤집어 그들에게 충분한 유기물을 제공해 주고 그들의 왕국이 더욱 굳건할 수 있도록 꽃이 피면 수분을 돕고 씨앗을 운반하기도 해. 그들이 말했어. 영원할 수 있다고. 그래, 우리는 그들의 영원한 왕국의 번영을 돕고 그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제공해 주는 거야.
그의 과장된 몸짓 탓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영원? 영원이라고 했니? 정말로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
내 말투가 거슬렸나 보다. 그가 허리춤에 얹었던 왼손을 떼어 입을 막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미안, 미안해. 그런 뜻은 아니고 너무 웅장하고 너무 위대한 것 같아서 그래."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그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럴 거야. 우뚝 서려하는 경쟁도 앞서려는 경쟁도 없이 이토록 넓은 왕국을 언제나 푸르게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억해. 그들은 모두 하나야.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그가 자세를 고쳤다.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 친구! 그대는 이제부터 영원한 왕국의 일원이 되었다네. 이를 정식으로 선포하고 진심으로 환영하네."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그야말로 빵 터졌다.
"큭큭큭. 그렇게 거창할 필요가.... 아악..."
별안간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발이 나를 덮쳤다.
'영원은 무슨, 여기에서 죽는구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야옹"
"어떻게 된 거지?"
영원히 뜨고 싶지 않았던 눈을 떴을 땐 대장이 내 정강이에 제 머리를 쿵쿵 부딪히며 앙앙거렸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던지 내 다리 사이를 연신 오가며 꼬리를 감았다.
"아, 미안 미안해, 대장. 너희들 밥 먹어야지?"
큰피막이풀에 빠져 녀석들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 주섬주섬 옆에 놔두었던 물그릇과 일용할 양식을 담은 비닐백을 챙겨 약속된 장소로 서둘러 향했다.
"대장아 가자."
그날 이후 며칠은 영하 10도를 밑돌았다. 많은 양의 눈도 왔었다. 눈 쌓인 아파트 화단에는 겨울집을 드나드는 고양이들의 작은 발자국이 콕콕 박혔다. 보고 싶었다. 하얗게 쌓인 눈 아래, 초록색 피막이 풀 왕국을.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따스한 겨울동화처럼 느껴졌다. 그리로 가는 내내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어디 보자. 여기쯤일 텐데... 없다. 그럴 리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눈 녹은 곳에 드러난 검붉은 흙과 뱀딸기 잎의 짙은 초록이 대비를 이뤘을 뿐, 하늘을 향해 방긋 웃던 동그란 피막이 풀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원할 거라고 했잖아.' 축 처진 어깨가 시리다. '그렇지 뭐, 그런 게 어딨겠어.' 하며 뒤돌아서려는데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죽지 않았어. 너무 추웠을 뿐이야. 땅속뿌리와 씨앗들 그리고, 땅에 묻힌 줄기들은 끄떡없어. 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영원을 꿈꿀 거야."
땅속 구멍으로 들어가려는 작은 개미 한 마리를 보았다.
하나에서 시작해 우리가 된 그들은 내가 죽어도 네가 살았으니 결국은 산 것이라고 했어. 나와 너를 구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대. 이쪽 끝의 잎이 빛을 받아 영양분을 만들면 줄기를 타고 저쪽 끝의 잎에 전해지지. 누군가 그들의 줄기를 끊어 서로 모른 척하며 살아라 할지라도 결코 "너"가 되지 않아. 그도 나와 다르지 않거든. 또 다른 나일뿐이야.
처음과 나중 그런 것은 의미가 없어.
그저 우린 손 잡고 사방으로 나아갈 뿐이야.
그렇게 한 덩어리로, 한 몸으로 사는 거야.
그에게 인사라도 건네려 했을 때는 이미 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피막이 풀은 주로 경기 이남의 따뜻한 지역을 좋아한다고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제주에 살고 있는 피막이 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들 지역에서 피막이 풀은 사계절 내내 푸르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곳의 겨울은 꽤 춥다. 어쩌다 날아온 씨앗이 그럭저럭 살만한 곳이라 여겨 생태를 이루었을까? 잘 모르겠다. 군락의 크기로 보아 여러 해를 살아 낸 모양이다. 이제야 너를 알아본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너를 알게 되어서 다행스럽다. 네가 잠시 내어 준 그 땅에는 뱀딸기와 별꽃이 신이 났더구나. 따뜻해지는 날 보자꾸나. 너도 날 잊지 않고 불러주겠지? 에메랄드 빛 찬란한 왕국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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