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자, 콩!

그림형제 동화집 <밀짚, 석탄, 콩>

by 이경아

"누가 지어냈을까?" 종종 그 기원이 궁금해지는 옛이야기가 있다. 두 쪽이 채 안 되는 짧은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지푸라기 한 가닥, 콩 한 알, 석탄 따위가 사람인양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어찌 재밌지 않을까. 게다가 은밀한 풍자까지 더해진 콩트와도 같은 이야기라면 그 여운은 더 길어지기 마련이다.


쌀 한 톨, 콩 한 알이 특별하지 않는 요즘에야 '콩 한 알 따위가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뭐든 귀했던 옛날에는 콩 한쪽에 우애를 담기도 했고 실수로라도 버려지는 쌀 한 톨을 두려워하기도 했더랬다. 내 어릴 적 기억에도 밑바닥을 드러낸 쌀독을 박박 긁던 엄마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이따금씩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 그 시절 터울이 크지 않은 동생과 다툼이라도 하는 날에는 "콩 한쪽도 나눠 먹어야지." 하는 꾸중을 잔소리처럼 들어야 했다.


<야코프 루트비히 그림>과 <빌헬름 카를 그림>은 여섯 형제 중 첫째와 둘째로 태어났다. 원래는 아홉 형제였는데 셋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렸을 때는 꽤 유복했지만 아버지 필리프가 마흔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쫓겨나거나 버림받은 왕자'가 되어 남의 도움으로 근근이 학업과 삶을 이어나가는 처지로 전락했다. 가난을 알아서일까? 그림 형제가 모아 출간한 동화집에는 하층민의 삶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참 많다. 익히 알려진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와 같은 화려한 궁궐 이야기도 제법 되지만 그보다는 하층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더 많다.


'밀짚, 석탄, 콩', 나는 이 이야기가 마냥 행복한 어린아이들의 재미를 위해 지어진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보다는 거칠고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도 주린 배를 충분히 채우지 못한 이들이 지어낸 웃픈 이야기였을 것 같다. 농 치는 듯한 싱거운 이야기에 "예끼 이 사람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게." 하며 손을 내젓는 이와 "하하하" 한바탕 웃어젖히는 이가 그려진다.


상상해 보자. 그곳은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먹고 자는 곳이다. 기숙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곳은 아니다. 시설이나 환경이 심각하게 열악하다. 그들은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처지가 답답하기는 하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가 마땅치 않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들 중 일부는 한때 농사를 짓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그 시절이다. 어린아이들 역시 극한 노동을 피할 수 없다. 공장주들은 값싼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아이들을 반겼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웃을 일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을 것 같지만 익살스러운 이야기꾼 한 명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다.


수용소처럼 어두컴컴한 그곳, 눈을 씻고 봐도 건더기는 보이지 않는 멀건 국물만으로 허기를 때운 그들은 딱딱한 침상에 모로 누워 웅크린 채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짚단을 쌓아 만든 침대에 누운 어린 소년도 다르지 않다. 집에 가고 싶다. 저벅저벅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잠을 청하는 소년의 등을 두드려 깨워 일으킨다. 그리고는 삶은 콩 한 줌을 내밀며 먹으라고 고갯짓을 한다. 잠시 주저하던 소년은 남자의 손바닥 위에 있는 콩 몇 알을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엄마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꼬마야 이것 좀 보렴. 콩 한가운데 그어진 검은 줄 보이지? 이게 왜 생겼는지 아니?"

옆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소년이 흘린 콩을 주워 소년에게 건네며 물었다.

"......"

소매 끝으로 젖은 눈을 문질러 닦는 소년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거 참, 또 실없는 소리 하려는 모양이군."

소년에게 콩을 건넸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야기해 줄 테니 들어볼래?"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이 공장에서 이야기꾼이라 불린다.

옛날에 말이다. 어느 마을에 가난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거든. 할머니는 수확을 마친 들판을 다니며 떨어진 콩을 주워 모았단다. 콩을 넣은 스튜를 만들 생각이었거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난로 속에 장작을 넣고 밀짚을 한 움큼 집어 불을 붙였어. 너도 잘 알고 있을 테지? 장작에 불을 붙이려면 불붙은 밀짚이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말이야. 이제 콩을 냄비에 넣어야겠지? 그런데 바로 그때 콩 한 알이 바닥에 떨어졌지 뭐냐. 할머니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냄비를 휘저었어. 그 사이 데구루루 바닥을 구른 콩이 딱 멈춰 선 곳이 한 가닥 밀짚 옆이었다는구나. 바로 그때 난로 속에서 불붙은 석탄 한 덩어리가 탁! 하고 튀어나왔지 뭐냐.


"얼씨구, 이번에는 콩, 밀짚, 석탄이 주인공인가 보네 그려."

손바닥 위에 남은 콩을 마저 소년에게 권하며 남자가 말했다.

"그렇다네. 자네도 잘 들어보게."

이야기꾼이 말했다.


석탄은 석탄대로 밀짚은 밀짚대로 모두들 한탄을 했단다. 이렇게 말이다.


"나는 운 좋게도 저 불 속에서 뛰어나왔지. 에휴 큰일 날 뻔했어. 있는 힘을 다해 뛰었기 망정이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야.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렸을 거라고."


"나도 운 좋게 탈출했지. 저 할멈이 나를 냄비 속에 집어넣었더라면 나 역시 내 친구들처럼 꼼짝없이 수프가 되고 말았을 거야."


"내 운명은 뭐 자네들보다 나았으리라 생각하나? 저 할멈은 내 친구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는 걸. 저 할멈은 단숨에 예순 가닥의 밀짚을 움켜쥐고는 난로 속에 처넣어 버렸는데, 휴... 다행히도 난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왔지."


이야기를 들으려 몰려든 사람들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구먼. 하하하."

"맞아 맞아. 우리도 이렇게 일하다간 언제 죽을지 몰라."


<콩을 삶는 가난한 노파, 브리스톨지 위에 블랙윙 연필>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밀짚, 석탄, 콩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단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외국으로 가야지."

누군가가 말했다.


"외국이요? 왜요?"

소년이 물었다.


"거기는 딴 세상일지도 모르거든. 이 망할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일 거야."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음...... 그래, 그게 좋겠다. 외국! 외국으로 가는 거야."

이야기꾼이 말했다.


자, 이렇게 해서 밀짚, 석탄, 콩은 함께 힘을 모아 외국으로 가기로 했단다.

산을 넘고 시냇물도 지나서......


"아저씨, 그런데 시냇물을 무슨 수로 건너죠?"

소년이 물었다.

"그야, 밀짚이 시냇물을 가로질러 누웠겠지. 모두들 건너라고 말이야."

이번에는 소년에게 콩을 주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오! 괜찮은 생각인 걸? 자. 잘 들어봐. 밀짚이 가로질러 눕자 불붙은 석탄이 먼저 밀짚을 밟고 시냇물을 건너는 거야. 그럼 안전하겠지?"

이야기꾼이 말했다.

"아니 괜찮지 않아요. 무서웠을 것 같아요."

소년이 말했다.

"누가? 왜?"

"불붙은 석탄이라면 바로 밑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좀 전까지도 슬픔에 흔들렸던 소년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반짝였다.

"음, 그렇지. 불은 물이 무섭지."

모여든 사람들 중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었던 남자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불붙은 석탄이 밀짚 위에 계속 서 있으면 밀짚도 위험 해질 텐데, 큰 일이네요."

소년이 말했다.


"에잇, 이 사람아. 다 끝났구먼. 외국은 무슨 외국. 모두 불에 타 죽고, 물에 빠져 죽는 게지?"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소년이 먹다 남긴 콩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잉 그렇게 되는 거예요?"

소년이 입을 삐죽이며 물었다.


"하하하. "

이야기꾼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란다."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불붙은 석탄과 밀짚은 그렇게 죽었단다. 하지만 콩은 죽지 않았어. 대신에 두 쪽으로 쪼개지고 말았지. 밀짚과 석탄의 꼴이 너무 우스워서 배꼽을 쥐고 대굴대굴 구르다가 그만 그렇게 되어 버린 거야.


모두들 그 모습을 상상하는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콩이 두 쪽으로 쪼개지다니.

그것도 의기투합했던 동료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배꼽을 쥐고 웃다가 죽을 지경이 된 콩의 꼴을

그려보고는 고놈 참 잘 되었다 싶던 가 보다.


한참을 웃던 소년이 말했다.

"그게 끝이에요?"

"아니, 아니지. 마저 들어보렴."

아직 끝은 아닌가 보다.


때마침 여행을 하던 재봉사가 시냇물 가에서 쉬고 있었거든. 그 꼴을 모두 다 보았지. 쪼개진 콩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대. 그래서 바늘과 실을 꺼내 콩의 배를 꿰매 주었단다. 콩은 열두 번도 넘게 절을 하며 고마워했대.

그때 이후로 콩들은 한가운데 검은색 이음매를 갖게 되었다는구나.


<시냇가에 앉아 콩을 꿰매는 재봉사, 브리스톨지 위에 블랙윙 연필>


"왜 검은색이죠?"

소년이 물었다.

"재봉사가 콩의 배를 꿰맬 때 검은 실을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이야기 끝. 잘 자렴."



누군가의 웃음과 눈물을 양분 삼아

보태어지기와 덜어지기를 반복하며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회자되는 것

그것이 옛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단한 세상살이에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상처를 봉합해 주는 검은 실은

옛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것 같다.



참고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토머스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당시를 비판하기 위해 했던 말이다.

16세기 초반의 영국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던 때였다. 모직물 공업의 발달로 양모 값이 폭등하자 지주들은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이 일터와 집을 잃고 도시로 쫓겨나 빈민이나 부랑자가 되었다. (1차 인클로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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