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불하지 않은 행운

by 이경아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눈이 펑펑 내리면 선녀들이 부지런히 청소를 하는 게로구나 했더란다. 옥황상제가 사는 궁궐 구석구석을 커다란 빗자루로 쓸어 내면 궁궐의 먼지들이 바람 타고 흩날리게 되는데 그게 보송보송 솜뭉치 같은 눈이 되는 거라지.

그러고 보니 동요도 있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또 누군가는 승천한 용이 구름 사이에서 격렬하게 몸을 틀다 구름에 부딪혀 떨어진 비늘이 반짝반짝 하얀 눈이 되어 내리는 것이라고도 했단다. 선녀의 비질에 날린 천상의 먼지든, 탈각한 용의 비늘이든 옛사람들의 하얀 눈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포근하다. 긴 겨울밤 추위를 한 이불속 체온으로 견디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거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된다.


독일의 옛사람들이 눈을 대하는 모습도 참 이쁘다.

홀레 할머니가 이불을 팡팡 터는 탓에 눈이 오는 거라고 했다니 도대체 홀레 할머니가 누굴까?

사뭇 궁금하다.


계모와 의붓딸 그리고 의붓딸과 대립하는 계모의 친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홀레 할머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계모는 과부다. 재혼했던 남편마저 죽고 없는가 보다. 잘 살아보려 했던 재혼일 텐데 남편의 죽음으로 그의 딸까지 부양하게 된 자신의 처지가 기막히기도 했을 것 같다. 게다가 이쁘고 부지런한 의붓딸과는 다르게 못생긴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한 친딸을 보고 있노라면 부화가 치미는 것도 언뜻 그럴 만도 싶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이라도 하듯 의붓딸을 구박했다. 궂은일은 의붓딸에게, 좋은 것은 모두 제 딸에게로 향했다.


그날도 그랬다. 구박데기 소녀는 우물가에 앉아 종일 실을 잣고 또 자았다. 실에 베인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 피에 얼레가 흠뻑 젖었다. 피로 물든 얼레를 씻으려던 소녀는 우물 위로 몸을 숙이다 얼레를 놓치고 만다. 소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계모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계모는 우물에 빠진 얼레를 건져 오라며 길길이 뛰었다. 발길을 돌려 우물로 되돌아온 소녀는 어쩔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다 직접 들어가 꺼내자 하고는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옛이야기 속의 우물은 종종 이승과 저승을 잇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차원이 다른 세계와의 연결 통로라고 해야 할까? 다만, 그 시절 그들의 우물은 우리의 옛 우물과는 달랐던 것 같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야 하는 아찔하게 깊은 우물은 아니었나 보다. 그보다는 물이 퐁퐁 솟는 깊은 샘 정도? 그래서 뛰어들면 죽게 될 거야 하는 수준의 위험을 무릅쓴 것은 아니었을 것 같다.


소녀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밝은 태양빛과 여기저기 흐드러진 꽃들이 내뿜는 향기로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풀밭마저 부드러운 그곳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빵이 가득 들어찬 오븐을 발견했다. 그 앞을 지나려던 순간 오븐 속 빵들의 외침이 들렸다.

"우릴 꺼내 주세요! 우릴 꺼내 주지 않으면 우리는 다 타 버리고 말 거예요. 우리는 딱 좋게 익었어요."

소녀는 오븐 옆 기다란 주걱으로 빵을 모두 꺼내주었다. '정성껏 구운 빵을 태워버릴 수는 없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소녀는 다시 걸었다.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사과나무 앞에 이르게 되자 이번에는 사과가 소리쳤다.

"날 흔들어 줘요! 날 흔들어 줘요! 내 사과는 충분히 잘 익었어요."

소녀는 이번에도 외면하지 않았다.

'충분히 잘 익은 사과를 제때 거두지 않으면 땅에 떨어져 썩어버릴 거야.'

라는 생각을 했었을 것 같다.

소녀가 사과나무를 흔들자 사과가 비 오듯 쏟아져 사방으로 굴렀다. 흩어진 사과를 모두 주워 한 무더기로 잘 쌓아 놓은 뒤에야 다시 걷던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 작은 오두막에 닿게 되었다. 조심스레 살피던 소녀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대문만큼이나 큼지막한 이를 드러내 보이는 험상궂은 인상의 할머니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겁에 질려 도망치려던 찰나 할머니가 소리쳤다.

"왜 날 두려워하지? 얘야, 나랑 같이 살자. 만약 네가 집안일을 잘 해낸다면 네게 좋은 일이 생길 게다. 그저 너는 내 이불을 깃털이 날릴 정도로 잘 털어서 깔끔하게 정돈해 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그 깃털들은 눈이 되어 지상에 내리게 될 거란다. 난 홀레 할머니거든."

눈이-내리는-이유_web.jpg <홀레 할머니의 이불을 터는 소녀, 종이 위에 연필>

겉모습과 다르게 할머니는 다정했다. 음... 물론, 다정한 할머니를 경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눈을 내리게 하는 홀레 할머니라 하잖는가. 그래서 소녀는 용기를 냈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할머니를 돕기로 했다. 집안일은 어렵지 않았다. 늘 하던 일이기도 하거니와 천성이 부지런했기에 할머니가 만족할 정도로 잘 해냈다. 이불 터는 일도 곧잘 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이 포근해할 만큼 충분한 눈을 내리게 해 주었다. 할머니 역시 소녀를 아껴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활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우울했다. 집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자신을 구박하는 계모와 의붓 언니뿐인데도 그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홀레 할머니는 소녀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할머니는 소녀의 손을 잡고 대문 앞으로 데려갔다.


대문이 열린 그 순간 할머니가 말했던 좋은 일이란 것이 생겼다. 굉장히 많은 금이 쏟아져 내려 소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넌 아주 부지런히 일해 왔으니 난 네가 그걸 가지고 갔으면 한다."

라는 말과 함께 소녀가 우물 속에 빠뜨렸던 얼레도 돌려주었다. 열렸던 대문이 다시 닫히자 어느새 소녀는 지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우물 위에 걸터앉아 있던 수탉이 소리쳐 반겼다.

꼬끼요오오!

황금옷을 입은 소녀여,

왠 새 옷을 걸치고 있나요?


계모 역시 되돌아온 소녀를 반겼다. 온몸이 금으로 뒤덮인 채 돌아왔으니 오죽 반가웠을까? 어찌 된 일인지 자세히 묻고 그 어느 때보다 귀 기울여 들었다. 사람 욕심이 참 얄궂다. 어마어마한 행운을 얻은 당사자가 친딸이 아닌 의붓딸이 되고 보니 배가 아파 못 견디겠던가 보다. 어차피 의붓딸이 가져온 금도 자신들과 함께 나누게 될 텐데 말이다. 계모는 못생기고 게으른 자신의 딸에게도 동일한 행운을 얻게 하려고 우물가에 앉혀 물레를 돌리게 했다. 게으른 딸은 실을 잣기는커녕 일부러 가시나무에 손가락을 눌러 피를 내어 얼레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얼레를 우물 속에 내던져 빠트린 후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 엉성한 연극에도 우물은 게으른 소녀를 천상으로 인도했다. 천상에 발을 디딘 소녀는 동생이 걸었던 그 풀밭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과연 동생의 말처럼 오븐 앞에 이르렀고 그 속의 빵들이 충분히 잘 구워졌으니 꺼내달라 소리쳤다. 그저 금을 얻는 것만이 목적인 소녀는 손에 검댕이 묻는 것이 싫다며 빵들의 외침을 무시했다. 사과나무의 외침 역시 통과했다. 떨어지는 사과에 머리가 깨지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홀레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의 대문짝만 한 이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던 터라 할머니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게으른 소녀는 동생과는 달리 할머니에게 일을 하고 싶다 먼저 청했다. 빵과 사과의 외침을 무시한 그녀였지만 할머니는 다시금 기회를 주고 싶었나 보다. 그녀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첫날은 나름 열심히 일을 했다. 할머니의 이불도 깃털이 팡팡 날리도록 힘껏 털었다. 눈앞에 금덩이들이 아른아른하다. 하지만 제 버릇 어디 갈까. 부지런함과 일머리도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둘째 날부터는 빈둥빈둥, 대충대충이었다. 보다 못한 홀레 할머니가 그녀를 내보내기로 작정했다.

홀레할머니03_web.jpg

눈치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까? 소녀는 오히려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상황 끝, 금벼락을 맞을 차례'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제 막, 게으른 소녀도 동생이 섰던 그 대문 앞에 섰다. 터질 듯 부푼 가슴이 얼마나 떨렸을까?


삐그덕, 대문이 열렸다. '후두두둑'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커다란 솥에서 마구 쏟아진 것은 금이 아니라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기름이었다.

"이것이 네가 일한 데 대한 보상이다."

홀레 할머니는 대문을 닫아 버렸다. 그 모습 그대로 게으른 소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 상황을 온 세상에 선포라도 하듯 우물 위에 걸터앉은 수탉이 소리쳤다.

꼬끼요오오!

더러운 소녀여,

웬 새 옷을 걸치고 있나요?


시커먼 기름은 소녀가 죽을 때까지 벗겨지지 않았다.


홀레할머니02_web.jpg <성난 홀레 할머니, 종이 위에 연필>

행운은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는 않는가 보다.

누구에게든 깃들 수 있는 것이 행운이다.

하지만 그 행운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까는

두고 볼 일인 것 같다.

평생을 옥죄는 끈적끈적한 굴레가 된 행운을 원망하며

차라리 그것을 붙잡지 말걸 그랬어 할런지도 모른다.


우연히 깃든 행운조차도

응당 치러야 할 값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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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