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해.
대기업 25년 차 부장으로 살아남아서,
서울에 아파트 사고
애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
드라마 제목인데 참 길기도 하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이 위대한 삶이 막 무너질 참이다.
<브레멘 음악대>에 등장하는 네 마리 동물들의 처지가 그렇다.
어떤 남자의 당나귀는 오랜 세월 동안 곡식 자루들을 방앗간으로 부지런히 날라 주었다. 누군가의 사냥개는 제 몸 사리지 않고 사냥터를 누볐을 것이고, 매일 밤 쥐를 잡던 고양이는 여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것이다. 비록 알을 낳을 수는 없지만 시간과 날씨를 알려주는 수탉도 제법 쓸만했겠지. 이대로 영원할 줄 알았는데 가는 세월이 참 야속하다.
힘도 쓰지 못하면서 먹기만 하는 당나귀가 못마땅한 주인은 그를 없애려 한다. 늙은 사냥개도 그 처지가 다르지 않다. 이빨이 무뎌져서 번번이 쥐 잡기에 실패하는 고양이가 난로 옆에 웅크리고만 있는 모습이 언짢은 여주인 역시 그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싶어 하는 눈치다. 아직 목청이 쓸만한데도 손님들을 위한 수프가 되어야 하는 수탉의 운명은 그날이 하필 성모 마리아가 빨래를 말릴 만큼이나 화창하고 축복받은 일요일이기에 더욱 서럽다.
이들의 운명이 어찌 김 부장만 못하다 할까.
그래서 모두들 청춘을 묻었던 그곳을 미련 없이 떠났다. 이렇게 말하니 제법 비장해 보이지만, 사실은 떠나지 않으면 곧 죽게 될 것이 분명해서 살기 위해 도망쳤을 뿐이다. 그렇게 뛰쳐나와 길가에 쭈그려 앉아 가뿐 숨을 몰아 쉬다 보니 혼자가 아니더라. 당나귀도 개도 고양이도 수탉도 사정이 비슷하다. 한창때는 좋았다. 그곳에 뼈를 묻으리라 열심히 살았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던 거지. 누군가는 '제깟 게 뛰어 봤자 벼룩이지'하며 조롱하겠지만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그래, 가자! 약속의 땅 브레멘으로.
그곳에서 우린 음악대가 되는 거야.
당나귀는 류트를 켜고
사냥개는 북을 치고
고양이는 밤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목청 좋은 수탉은 보컬을 하는 거야.
자유의 땅 브레멘에서라면
누구의 억압이나 간섭도 없이
새로운 꿈을 펼칠 수 있겠지.
물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테고.
길 떠나는 그들을 보라.
희망에 찬 행진이다.
아... 그런데 브레멘은 꽤 멀다.
어쩌나.
쉬지 않고 걸어도 오늘 밤 안으로 그곳에 닿을 순 없다.
그러니 쉬었다 가자.
오늘 밤은 이 숲의 저기 저 큰 나무 밑에서 자고 가는 거야.
당나귀와 개는 큰 나무 밑에 엎드려서, 고양이와 수탉은 나무 위에서 이 밤을 보낼 참이다. 사주 경계가 일상인 수탉은 고양이보다 높은 가지에 올라 잠들기 전 사방을 살폈다. 멀리서 밝은 빛이 보였다. 수탉은 막 잠이 든 친구들을 깨웠다. "저기 저 불빛을 따라가면 멀리 않은 곳에 집이 있을 것이 분명해." 불편한 잠을 애써 청하던 당나귀 역시 "이곳은 그리 편한 곳이 못 되니 우리 그리로 가 보자." 했다. 개도 동의했다. "그곳에 가면 고기라도, 아니면 뼈다귀라도 먹을 수 있을지도." 그렇게 모두들 빛을 향해 갔다. 마침내 그들은 불을 환히 밝힌 집에 다 달았다. 알고 보니 그곳은 도적들의 소굴이었다. 도둑들은 음식을 거하게 차려놓고 먹고 마시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네 마리의 동물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다.
어떻게 하면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둑들을 쫓아낼 수 있을까?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당나귀가 몸을 곧추세워 창턱에 두 앞발을 대고 있으면
개가 당나귀의 등 위에 올라타고,
고양이가 다시 개 위에 올라타고,
수탉이 몸을 날려 고양이의 머리 위에 걸터앉는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즉시 그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수탉이 고양이의 머리 위에 멋지게 걸터앉자마자
모두들 연주를 시작했다.
당나귀는 히이잉 하고 외쳐 댔고,
개는 멍멍 짖어 댔고,
고양이는 야옹야옹 울어 댔고,
수탉은 꼬끼요오 하고 악을 써 댔다.
성공이다. 깊은 밤 갑작스러운 소란을 유령의 짓이라 믿은 도둑들은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채 숲 속으로 도망쳤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네 마리 동물들의 차지다. 종일 굶어 배가 고팠다. 내일은 없다는 듯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다. 배가 부르자 피곤이 몰려왔다. 네 음악가들은 불을 끄고 각자의 습성과 성질에 따라 잠자리를 하나씩 골랐다. 당나귀는 마당의 거름더미 위에, 개는 문 뒤에, 고양이는 난로 옆의 따뜻한 재 위에, 수탉은 지붕의 들보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이들은 이곳에서 스피노자가 말했던 자신의 본성(코나투스-Conatus),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힘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을까?
엉겁결에 도망치고 보니 아무래도 미심쩍었나 보다. 두목은 부하에게 집으로 돌아가 살펴볼 것을 지시했다. 집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나 보다. 촛불을 켜 보자."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불붙은 석탄이구나." 성냥개비를 갖다 댔다. 그러자 "하악"하고 침을 뱉는 소리가 들리더니 날카로운 무언가가 얼굴을 스쳤다. 불붙은 석탄이 아니라 고양이의 번뜩이는 두 눈이었던 것이다. 도둑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문으로 달아났다. 거기에 있던 개가 덥석 그의 다리를 물었다. 그 길로 마당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러다 거름더미 옆을 지나치려는데 당나귀가 뒷발로 도둑을 호되게 걷어찼다. 그 소란에 잠에서 깨어난 수탉은 "꼬끼요오오오!"하고 악을 써댔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친 도둑은 두목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 집에는 무시무시한 마녀가 살고 있어요! 그 마녀는 제게 침을 뱉고 긴 손톱으로 제 얼굴을 할퀴었어요. 그리고 문 앞에 칼을 든 사내가 제 다리를 찔렀습니다. 제가 다시 마당으로 도망쳐 나오니까 시커먼 괴물이 몽둥이로 저를 후려쳤어요. 그리고 지붕 꼭대기에는 재판관이 앉아 있었는데 "저 악당 놈을 이리로 데리고 와!"라고 소리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 길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이후로 도둑들은 그 집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대는 그 집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 그 집에서 살았다.
각자의 습성과 성질에 따라.
브레멘은?
만약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면 아마도 이렇게 답했을 것 같다.
글쎄, 왜 그곳에 가야 하지?
이곳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이곳이 우리가 꿈꾸던 브레멘이니까.
우린 우리를 위해 함께 노래할 거야.
'브레멘 음악대'라는 꿈은 다 늙어 쓸모 없어진 그들에게 닥친 죽음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지 그 자체가 절대적 목표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로 살고자 나선 길이었음을 그들은 끝까지 잊지 않았다. 그래서 브레멘으로 향하던 길에 발견한 우연한 행복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나 보다.
드라마 속 김 부장 역시 '진짜 나로서 살아가는 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진짜 소중한 것이 무언이지, 자신의 코나투스를 회복하는 중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의 브레멘에 닿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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