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린데와 요링겔
<요린데와 요링겔 / 그림 형제 동화집 / 현대 지성>
소문에 따르면 마법사는 성에서 백 보 이내의 거리에 남자가 들어오면 즉시 마법을 걸어 꼼짝 못 하게 한다. 만약 순결한 처녀라면 새로 변하게 만든 다음 버드나무 가지로 짠 바구니에 넣어 성 안의 방으로 가져간다. 그 방 안에는 새가 든 바구니가 칠천 개 넘게 있다.
강물에 어린 버드나무는 어쩐지 슬프다. 가늘고 길게 휘어진 잎들이 흘러가는 강물을 향해 한껏 뻗어보지만 줄기에 매인 처지라 흐르는 물살을 따를 수 없어 그저 처연하게 흔들릴 뿐이다. 옛사람들도 버드나무를 향한 느낌이 다르지 않았다. 강가에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처하는 것 같아 어떤 이는 이별을 떠올리기도 했고 신비로운 마력을 지닌 능력자로 보기도 했다. 마녀의 빗자루나 마법사의 지팡이 역시 버드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과 J.K. 롤링의 소설 <해리포터>에서도 신비로운 버드나무가 등장한다. 반지 원정대를 가둔 윌로우 맨과 호그와트의 움직이는 커다란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다. 물론 둘의 역할은 사뭇 다르다. 윌로우 맨(버드나무 영감)은 죽음 편에 섰고, 호그와트의 버드나무는 수호자로서다. 릴리 포터(해리 포터의 엄마)와 론 위즐리의 지팡이 역시 버드나무로 만든 것이다. 이뿐이랴. 이름을 가진 최초의 알약이라 일컬어지는 바이엘사의 <아스피린> 역시 버드나무껍질의 추출물로 만든 약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오래전부터 버드나무껍질을 진통제로 사용했다. 그런 신통방통한 버드나무 가지로 짠 바구니에 담긴 새라니.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라 그냥 지나치려다 돌이켰다. 버드나무에 멈칫했던 것이다. 찬찬히 곱씹어 읽다 보니 달리 보인다.
마법의 기운 그것도 사악한 마법이 가득한 숲 한가운데로 요린데와 요링겔이 걸어 들어오고 있다. 그 나라에 요린데보다 더 아름다운 처녀는 없었다. 요린데는 아름다운 청년 요링겔과 사랑에 빠졌으며 결혼을 기다리고 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와 잘생긴 젊은이, 그러니까 한창 좋을 때라는 말이다. 세상에 오직 둘만 보이는 때이다. 사랑은 끔찍한 마법사가 사는 숲에 대한 두려움조차 잊게 만들었다. 그들은 오직 둘만의 시간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꺼리는 숲으로 기꺼이 들어온 것이다. 밀회를 즐기기 위해. 그럼에도 숲 전역에 흐르는 서늘한 느낌이 걱정스러웠던 요링겔은 이렇게 말한다.
"성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요."
그때 멈췄어야 했다.
물론 가능치 않았겠지만.
사랑이란 그런 법이다.
어느덧 나무줄기 사이에 걸린 저녁해가 짙푸른 숲에 한줄기 빛을 던졌다. 곧 일어날 비극을 예견이라도 하듯, 늙은 자작나무에 앉은 멧비둘기가 구슬프게 노래를 부른다. 그 지저귐에 요린데와 요링겔도 덩달아 슬픔에 잠겼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들은 자신들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행이다. 아직 해가 산 중턱을 넘지 못했다. 어둠이 밀려들기 전에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지. 요링겔이 덤불 사이를 헤쳤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낡은 성벽이었다. 끔찍한 마법사가 산다는 그 성이다. 요링겔은 기겁을 하고 요린데는 노래를 불렀다.
<그림 형제 동화집의 요린데와 요링겔 / 현대 지성>
요린데의 노래가 끝났을 때 요링겔은 그녀가 작은 새로 변한 것을 보았다. 그 새를 지빠귀라고도 하고 나이팅게일이라고도 하는데, 지빠귀와 나이팅게일 모두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란다. 특히 나이팅게일은 '밤의 노래꾼'이라 불린다 하니 이 이야기에는 나이팅게일이 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작은 새로 변한 요린데를 보고 놀랄 틈도 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올빼미가 이글이글 눈을 번뜩이며 새로 변한 요린데 주위를 세 번 뱅뱅 돌면서 "슈-"하고 울었다. 이로써 주술적 봉인을 끝낸 것이다. 요린데는 나이팅게일이 되었다. 그 옆에 섰던 요링겔은 돌처럼 굳어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는 신세다.
밤이 깊어지자 덤불 속으로 날아든 올빼미는 삐쩍 마른 노파가 되어 돌아왔다. 누런 얼굴에 커다란 눈은 시뻘겋게 번뜩였고 길쭉한 코는 턱에 닿을 듯 말 듯 구부러졌다. 노파는 뭐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나이팅게일을 움켜쥐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요링겔은 여전히 무력하다. 잠시 후 돌아온 노파는 자히엘이라 불리는 정령에게 요링겔을 풀어줄 것을 명했다.
"자히엘, 달빛이 바구니를 비추거든 저 남자를 풀어 주어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어기면 안 돼."
그렇게 마법에서 풀려난 요링겔은 노파 앞에 무릎을 꿇고 요린데를 돌려달라 사정했으나 노파는 다시는 요린데를 보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는 훌쩍 가 버렸다. 이때부터 요링겔은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사랑밖에는 난 몰라, 요린데 없이 어찌 살까?' 울부짖던 요링겔은 집을 떠나 낯선 마을로 가서 양치기가 되었다. 양을 치면서 틈틈이 요린데가 갇혀 있을 성 부근을 살폈다. 가까이 가기에는 아직은 두려운 듯 멀찍이 살필 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진주가 박힌 붉은 꽃을 발견하고 그 꽃을 들고 성으로 갔는데 꽃이 닿을 때마다 마법이 풀렸다. 그리고 마침내 요린데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집을 나선 요링겔은 산이란 산을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꿈에서 보았던 붉은 꽃을 찾기 위해. 자그마치 아흐레 동안 밤낮으로 헤맸고 열흘째 되던 날의 이른 아침, 마침내 피처럼 붉은 새빨간 꽃을 찾아냈다. 다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 성에 닿았다. 과연 성문에 꽃을 대자 기다렸다는 듯 스르륵 문이 열렸다. 성 안에 들어간 요링겔은 새소리를 따라갔다. 7천 개의 바구니가 있는 방이었다. 그곳에서 바구니 안에 든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는 마법사와 딱 마주쳤다. 마법사는 요링겔을 보더니 불같이 화를 내며 독을 뿜었다. 하지만 요링겔에게 미치지는 못했다. 요링겔의 붉은 꽃 때문이다. 힘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를 뒤로 하고 요링겔은 바구니들을 살폈다. 어느 바구니에 요린데가 있을까? 나이팅게일만 해도 수백 마리다. 난감해하던 그때 마법사가 몰래 바구니 하나를 집어든 채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오늘의 요링겔은 어제의 나약하고 무능한 요링겔이 아니다. 오랫동안 양을 치며 단련했던 체력과 솜씨로 이를 눈치채고 번개만큼이나 빠르게 달려가서 붉은 꽃을 바구니와 마법사의 몸에 대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마법이 풀렸다. 요링겔의 눈앞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요린데가 서 있었다.
요링겔은 다른 새들의 마법도 풀어 준 다음 요린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빼곡한 글씨로 세 쪽이 채 못 되는 동화는 읽는 내내 맘껏 상상을 그릴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한다. 마법사는 물론이고 버드나무, 멧비둘기, 자작나무, 달빛, 양치기, 진주가 박힌 붉은 꽃 등 상징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정답은 없다. 때론 백마 탄 왕자가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하는 케케묵은 옛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 "요즘 젊은 애들은 말이야. 세상살이를 몰라. 좋아라 하면 그만인 줄 알아. 사랑 그게 뭐라고..." 하는 잔소리로 읽힐 수도 있다. 물론 뒤죽박죽 감정을 섞어 읽어도 꽤 재미가 있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의 제법 진지한 시선으로 봤을 때, 마법사의 구속은 그 시대의 구태의연한 관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금기를 넘었을 때 처해질 형벌 같은 것 말이다. 이야기 초반, 순결한 처녀 운운하는 모양새가 그렇다. 둘이 함께 사랑을 했지만 구속당하는 것은 오직 처녀들 만이다. 어두운 성에 갇힌 요린데는 마법사가 주는 먹이로만 연명하면서 오매불망 요링겔이 능력자가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시킨 요링겔은 그 스스로 삶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데 비해 요린데는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옛이야기 속 대개의 여성이 그러하듯 스스로 행복을 구할 수 없다.
"당신 때문이야, 난 내 인생을 살지 못했어, 케말. 난 배우가 되고 싶었어."
퓌순이 케말에게 내뱉었던 말이 요린데에게 겹쳐졌다.
퓌순과 케말은 요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의 주인공이다.
오랜 시간 바라던 퓌순과의 결혼을 앞두고 떠난 여행길에서 그들은 파국을 맞는다.
감정이 격해진 퓌순에게 케말은 이렇게 답한다.
"너도 옆에 강한 남자 없이 혼자 그 길에 나서는 걸 두려워했잖아, 퓌순."
이 대화 이후 운전대를 잡은 퓌순은 시속 105킬로미터로 달려 105년 된 플라타너스를 들이받고 죽는다.
플라타너스 나무 뒤로는 해바라기밭이 펼쳐져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성벽과도 같은 플라타너스가 퓌순을 죽게 한 것이다.
나의 나이팅게일은 그 스스로 버드나무로 짠 바구니를 벗어나 105년 된 플라타너스 꼭대기로 날아올라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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