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동반자는 개뿔

여우 마나님의 결혼

by 이경아

두 성인 남녀가 실질적, 형식적 요건을 갖추어 맺는 가족 형성 행위를 결혼이라 한다. 우리 법에서 정하는 법률적 계약으로서의 결혼은 만 18세 이상의(미성년일 경우 부모의 동의 필요) 당사자 쌍방 사이에 진정으로 결혼하겠다는 합의라는 실질적 요건을 요구한다. 근친혼을 금하기에 8촌 이내의 혈족이 아니어야 하며, 다른 사람과 법률상 혼인 관계에 있는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는 중혼 금지 역시 실질적 요건에 포함된다. 이러한 실질적 요건과 더불어 반드시 법률에 따라 관할 관청에 혼인 신고를 해야 한다는 형식적 요건(절차상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결혼이라는 계약이 성립된다. 이로 인해 취득한 배우자 지위로 서로의 법정 상속인이 되고 친족 관계가 형성된다. 또한 동시에 동거, 부양, 일상 가사등에 협조할 의무도 지게 된다.


어디에도 결혼의 성립 조건으로 '사랑'은 없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당사자 쌍방 사이에 진정으로 결혼하겠다'는 합의 정도가 '사랑하는 마음'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대단한 집안의 결혼이 요란했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스스로를 결혼 시장의 상품이 되기를 주저치 않는 모양새다. 집안 어른들이 말 나지 않게 솜씨 좋은 매파를 통해 자식의 연을 찾아주려 했던 예전 세대보다 진일보한 요즘에는 결혼정보회사니 커플매니저니 하는 것들도 모두 옛 말이다. 스스로 자신이 몇 점짜리인지 점수를 매겨 당당하게 중매앱에 진열하고 그에 걸맞은 상대를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차며 세태를 탓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이란 원래가 그런 것인가 보다. 예로부터 쌓인 부와 명예 등을 대대손손 안정적으로 보전하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을 돕는 도구였으니 말이다.


옛날 어느 곳에 꼬리가 아홉 개 달린 늙은 여우가 살고 있었더랬다. 어렸을 적,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무서워 눈을 반쯤 감고 봐야 했던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니 두려워할 필요 전혀 없다. 풍성한 꼬리가 한 개도 두 개도 아니고 아홉 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끝내주는 스펙을 갖추었음을 뜻할 뿐이란다.


#첫 번째 이야기

꼬리 아홉 개인 여러모로 능력 좋은 늙은 여우는 자신의 아내인 젊은 여우가 영 미덥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소홀한 것 같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 거실의 기다란 의자 밑에 쭉 뻗고 죽은 듯 누웠다. 아내가 어쩌는지 시험해 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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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의 아내는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하녀인 고양이 처녀는 화덕으로 가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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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상황일까 싶지만 독일의 옛 풍습이란다. 남편이 죽었으니 외부 활동을 삼가고 방에 머물며 한껏 슬퍼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다. 곧 들이닥칠 조문객들을 맞이할 준비는 마님의 하녀인 고양이 처녀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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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인 젊은 여우는 늙은 남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별다른 모양새는 취하지 않았다. 마치 이날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확인도 없이 장례 절차에 돌입한 것이다.


여우마나님01_web01.jpg <종이 위에 연필, 죽은 척하는 늙은 여우>

늙은 여우가 죽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소식을 듣고 여우 마나님을 위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는 젊은 여우다. 고양이 하녀가 문을 열자 한껏 예를 갖춰 조문이 아닌 구애를 한다.


여우 마나님은 무얼 하고 계십니까?


방에 앉아 계십니다.

슬픔에 젖어 흐느끼고 계세요.

두 눈이 새빨개졌답니다.

여우 아저씨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림 형제 동화집 / 현대 지성-


미안하지만 부인을 사모하는 젊은 여우가 구혼하러 왔노라 전해 주시겠소?


어려울 것 없지요.


고양이는 폴짝폴짝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마님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마님은

"어떻게 생겼던? 돌아가신 그 양반처럼 꼬리가 아홉 개더냐?"

하고 물었다.

"아뇨, 꼬리가 하나 던걸요."

"그럼 나와는 맞지 않아."

단칼에 거절했다.

그 이후로도 여우들이 계속 문을 두드렸다.

꼬리가 두 개인 여우, 세 개인 여우......

모두 퇴짜를 맞았다.

마지막으로 꼬리 아홉 개인 여우가 나타났을 때에야 여우 마나님은 신이 나서 외쳤다.


자, 대문도 방문도 활짝 열고
주인아저씨를 밖으로 내가거라.
-그림 형제 동화집 / 현대 지성-


장례 끝, 결혼 시작이다.


그때 긴 의자 밑에서 죽은 듯 누워있던 늙은 여우가 몸을 꿈틀거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대한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는 부인을 포함해 모두를 집밖으로 내쫓았다.


#두 번째 이야기

늙은 여우가 죽었다. 죽은 척이 아니라 진짜로 죽었다. 성질도 급하지. 관뚜껑도 채 닫기 전일 텐데 늑대가 젊은 미망인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 여우 마나님의 안부를 묻는 늑대에게 답하는 마나님의 사람인 고양이 하녀가 참으로 천연덕스럽다.


방에 앉아 계시지요.

슬픔에 젖어 흐느끼고 계세요.

어찌나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지.

주인아저씨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림 형제 동화집 / 현대 지성-


그 한 없는 슬픔을 늑대가 보듬어 주려나 보다.

"마음씨가 비단결 같은 남편감을 원한다면 이 몸이 왔다고 전해 주게나."


고양이는 쏜살같이 2층으로 내달려 마나님이 계신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다섯 개의 금가락지가 반짝였다. 아마 늑대도 이 금가락지를 보았을 것이다.

하녀마저도 금으로 치장하는 대단한 집안이구나, 내가 이 댁 부인과 연을 맺게 된다면...

하는 기대로 침을 꼴깍꼴깍 삼켰을는지도 모르겠다.


"빨간 바지를 입고 입이 뾰족하더냐?"

"아뇨."

"그럼 나와는 맞지 않는다."


여우 마나님의 성에 차지 않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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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돌아간 다음에도 개, 사슴, 산토끼, 곰, 사자 등등 숲의 모든 동물들이 청혼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모두들 죽은 여우가 가졌던 좋은 점 중 어느 한 가지도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고양이 처녀는 그때마다 구혼자를 돌려보내야 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하긴 늙은 여우가 남긴 재산이 어마어마할 텐데 아무 하고나 결혼할 수는 없었겠지.


드디어 대단하신 여우 마나님의 마음에 딱 드는 젊은 여우가 나타났다.


"그 신사분이 빨간 바지를 입었더냐? 입이 뾰족하더냐?"

"네."

"그럼 모시고 올라와라."


그리고 여우마나님은 이렇게 외쳤다.


자, 창문을 활짝 열어라.

주인아저씨가 확실히 나가도록.

그 양반이 쥐를 많이 잡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혼자서 먹어 치웠단다.

나는 입도 못 댔어.

-그림 형제 동화집 / 현대 지성-


여우마나님02_web01.jpg <종이 위에 연필, 짝을 기다리는 여우 마나님>


많은 사람들의 춤과 환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젊은 여우와 여우 마나님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어찌나 즐거워하던지 그들의 춤은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늙은 여우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저 성대한 결혼식을 핑계 삼아 놀고먹으니 신났으려나.


그림 형제 동화집의 <여우 마나님의 결혼식> 이야기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이야기가 유럽에도 있었구나 신기해서 읽었다가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귀하신 분들의 결혼을 이토록 냉소적으로 풍자하다니, 블랙 코미디다. 게다가 잘나신 분들은 여우, 늑대 등의 동물들이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하며 결혼식의 성대한 축하연을 즐기는 이들은 사람들이다.


나는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책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녀석들도 짝 찾는 것에 꽤나 신중하다. 짝짓기 철이 되면 수컷은 자신의 영역 곳곳에 오줌을 뿌려 흔적을 남긴다. 고양이는 암수를 가리지 않고 쪼그려 앉은 자세로 오줌을 눈다. 하지만 표식을 위한 것일 때는 당당히 서서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세우고 꼬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오줌을 힘껏 뿌린다. 수컷이 암컷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그 앞을 지나는 암컷은 러브레터가 얼마만큼 높은 곳에 도달했는지를 확인하고 키가 크구나 작구나를 알아낸다. 그뿐 아니라 러브레터를 통해 수컷의 영양 상태도 알 수 있단다. 고단백의 식사를 하는 부자구나, 꽤 건강한데? 그들은 철저하게 스펙을 보고 짝을 고른다. 속물이라고 흉볼 필요 없다. 종족 보존의 본능이다. 그저 DNA에 각인된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영혼의 끌림? 이런 것은 그들 세계에서는 아예 기대할 수 없다.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꼬리가 아홉 개가 달렸든 빨간 바지를 입었든 그들은 본능에만 충실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떡이나 먹고 춤이나 출 수밖에.




덧붙이는 글 : 처음 약속했던 연재 요일은 목요일입니다. 하지만 목요일 글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제법 힘든 일이 생겼거든요. 마음이 산란해서 도무지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휴재 공지를 할까 하다가 다음 주라고 상황이 나아질까 장담할 수 없어 날짜를 토요일로 변경해서 글을 올립니다.



#그림형제 #동화 #옛이야기 #손그림 #여우마나님의결혼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