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손자
<민음사 / 프란츠 카프카 / 변신 >
그레고르는 무너져 내린 집안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왔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고 많은 돈을 벌어 온 식구의 씀씀이를 감당했던 그였다. 한때는 모두들 그레고르의 수고를 고마워했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다, 그레고르도 그의 가족들도. 그저 관성처럼 돈을 벌어다 주었고 또 그 돈을 받아 썼을 뿐 그들 사이에 특별한 따뜻함은 더 이상 없었다. 다만 여동생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는데 돈이 얼마가 들든 이듬해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여동생이 원하는 음악 학교에 보내줄 것이라 다짐했다. 그랬던 그레고르 잠자가,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아침에 흡사 거대한 바퀴벌레를 연상케 하는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 물론 변한 것은 겉모습뿐이었다. 그의 내면은 이전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오로지 가족의 유일한 부양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새벽 5시에 기차를 타야 하는 것도, 형편없는 식사도, 끊임없는 상사의 갈굼도,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고단함까지도 감내했던 그였는데 해충처럼 변해버린 그가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그의 가족은 바랐다. 그에게 가장 나빴던 것은 그레고르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언제나 순수할 줄 알았던 여동생의 변심이었다. 그녀가 그레고르를 '오빠'라는 2인칭의 인격적인 호칭 대신 사물에나 붙일 것 같은 몰감정적인 '이것'이라 부르게 되면서 그녀는 가족 중 그레고르에게 가장 잔인한 존재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레고르 잠자는 차라리 죽을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옛날 어느 마을에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이 있었다. 너무 늙어서 눈도 침침했고 귀도 어두웠으며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 탓에 제 몸 가누기도 어려웠다. 밥이라도 먹을라치면 후들후들 손이 떨려 수프를 줄줄 흘렸고 그나마 입으로 들어간 음식도 뚝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노인의 아들 내외는 이 꼴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난로 뒤편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밥을 먹게 했다. 그나마도 진흙으로 빚은 접시에 쥐꼬리만큼이나 적은 양의 음식을 주었다. 식탁 위에 앉아 맛있게 밥을 먹는 아들 내외를 바라보는 노인은 서럽고 슬프다. 어느새 노인의 슬픈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내 꼴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세월을 거스를 수 없어 이리된 것을.' 주르륵 흐른 눈물이 주름진 입술을 타고 무너져 내린 잇몸을 넘어 입 안의 음식과 뒤섞였다.
어느 날엔가는 손이 심하게 떨리는 바람에 접시를 놓치는 일이 있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접시는 '퍽' 소리를 내며 맥없이 깨져버렸다. 온갖 모진 소리를 퍼붓는 며느리에게 힘없는 노인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쭈그려 앉아 한없이 미안해했다. 그날부터 며느리는 깨진 접시 대신에 싸구려 나무 접시에다 음식을 담아 주었다. 이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살피는 시선이 있었다. 부부의 아들이자 노인의 손자인 네 살 된 어린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아이 보기에 부모의 행동이 기이했을지도 모른다. 음식을 흘리는 어설픈 행동은 자신도 마찬가지인데 할아버지만 식탁에서 밀려나 홀로 밥을 먹는 모습이 퍽 이상했을 터였다.
그때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다. 가족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밥 먹다 말고 어린 아들이 바닥에 내려앉더니 나무조각들을 짜 맞춘다. 노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구석에 쭈그려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너, 뭐 하는 거냐?"
아이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가 물었다.
"작은 여물통을 만들어요."
나무조각 하나를 손에 쥔 채 아이가 답했다.
"왜 그것을 만드는 거지?"
아버지가 물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엄마도 먹던 빵을 접시에 내려놓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가 커서 어른이 되면 어머니 아버지한테 드릴 음식을 여기에 담으려고요."
제 스스로도 대견한 듯 큰 소리로 또박또박 아이가 말했다.
다행이다. 이 이야기는 바람직한 동화다.
아들과 며느리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장에 바닥에 쭈그려 앉아 밥을 먹는 늙은 아비를 식탁으로 모셨다. 그때부터 노인은 가족과 한자리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노인이 여기저기 음식을 마구 흘려도 아들 내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비현실적인 결말이다.
차근차근 살펴 읽으면 효를 가르치고자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늙었다고 차별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사람으로서의 존중은 마땅한 거라는 평범한 이야기인데도 이 이야기가 젊은 세대를 가르치기 위한 나이 든 이들의 꼼수는 아니었을까 나도 모르게 지레 겁을 먹고 피하려 했다. 오십 넘었으니 마음이 급해져 제 일인 양 나선다 오해받기 싫어서였던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히 SNS에서 어떤 이가 쓴 '70세 이상의 노인들은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 그게 국가나 사회에도 이익이 될 것 같다'라는 내용의 게시글을 읽었다. 글을 접하고 화들짝 놀란 나는 '어머 어머, 헉...'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회복 불가능한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려는 목적의 존엄사가 아니라 노인들의 안락사라니, 글쓴이에게 나이 칠십 넘은 노인들은 <곧 치워버려야 할 잉여 인간>쯤으로 여겨지나 보다. 사고나 질병으로 세상과의 작별을 일찍 고하게 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나 노인이 된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요즘에는 노화도 질병이란다. 그래서 어느 정도 늦출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불멸을 꿈꾸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속절없이 늙는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70세 정도는 노인이라 부르기도 면구스럽다.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경제 활동도 하고 싶어 하고, 건강이야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시절을 몸으로 버티어 낸 덕에 그 어떤 세대보다 힘듦을 잘 견딘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을 말하고자 할 때는 적어도 80세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게시글에서 제시한 나이라는 획일적인 기준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노인들 때문에 젊은 세대의 마땅한 몫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 마뜩지 않다는 표현을 공익에 빗대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노인들에게 주는 혜택과 기초연금이 젊은 세대가 내는 세금으로 주는 것 같아 꽤 아까웠나 보다.
오늘의 노인들이 어떤 사람들이던가. 그들은 참혹했던 전쟁과 가난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족을 잃지 않은 집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전쟁이었다. 그래서 대단한 삶을 바라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밥만 먹고살면 되었다. 어딜 가도 밥 굶는 사람들 천지였으니까. 풀뿌리, 나무껍질까지 벗겨 먹으며 살아남았다. 그 시절 대한민국의 경제는 북한보다 못했다. 꿈이 있어 산다기보다는 죽는 게 무서워 살아 낸 시간이었다. 제법 웃어도 되는 세상을 살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이제야 어떤 노인은 못 배운 것이 평생 한이 되어 어디다 쓸까 싶은 공부를 하기도 하고 침침한 눈을 비비며 지문 없는 둔한 손가락으로 스마트 기기 사용을 배우기도 한다. 돌아서면 언제 배웠나 싶게 깨끗하다. 그럼 또 배우고 또 잊어버리고 그러는 사이 아까운 시간이 자꾸만 저물어 간다. 야속하게도 이미 기울기 시작한 석양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묻힌다. 올봄 보았던 꽃을 내년 봄에도 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그들이다. 어느 세대나 그 나름의 힘듦이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지금의 노인들 세대가 살았을 그 시간으로 가고 싶지 않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누구 말마따나 내가 잘 나서 이만큼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아 때를 좀 잘 만났을 뿐이다.
겉모습만 벌레였다. 그레고르 잠자가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벌레로 변했어도 변함없이 가족을 챙기고 가족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레고르는 그저 끔찍한 벌레였다. 끝내는 부모조차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라 했고 사랑하는 여동생 역시 내 오빠일 수가 없다고 했다.
내보내야 해요. 그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레고르는 먹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죽었다.
납작하게 말라비틀어진 채로.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출근을 앞두었던 그레고르에게 벌어진 일이다.
그레고르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들은 꿈에 부풀었다. 이제는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레고르가 맡았던 역할은 여동생이 대신할 것이다.
3년 전 돌아가신 엄마는 살아 계실 때 내게 말하곤 했다
노인들이 너무 오래 살아.
젊은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눈치 보여.
병원에 가면 모두 노인들 천지야.
그 병원비 젊은 사람들이 다 감당하는 거잖아.
엄마, 엄마 세대의 고생이 엄청났잖아.
세상에... 그 난리통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렇게 가난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았잖아.
그 덕분에 우리 세대에게 오늘이 있는 거고.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고 좀 즐겨 봐요.
입버릇처럼 빨리 죽어야 젊은 사람들이 산다고 하셨지만 막상 그때가 성큼성큼 닥쳐왔을 때는 다른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셨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엄마의 죽음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펐다. 가족으로서, 자식으로서의 슬픔이 아니라 영원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슬픔이었다. 선을 넘듯 산 자에서 죽은 자가 되어 다시는 숨 쉴 수 없고 다시는 의식할 수 없는 무생물이 된다는 것에 대한 설움이었다.
우리 사회가 노인들의 삶을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홀로 생의 뒤안길로 향할 그들을
제대로 배웅해 주었으면 좋겠다.
특별한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동화에서처럼 존재하는 이로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걷게 될 그 길을 우리도 곧 따르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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