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망하는 이야기

암탉의 죽음

by 이경아

먹지 말라해서 그러마 했다. 그것이 아니어도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고 맛난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빨갛게 익은 열매를 딱 한 입 베어 물고 싶더라고. 그깟 사과 한 알 쯤이야 했던 거지. 딱 한 알 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렸길래, 보기에도 먹음직하길래, 새콤달콤한 향기가 진동하길래, 딱 한 알! 반으로 쪼개 내 님과 서로 나눠 먹었을 뿐이라고.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될 줄이야.



일곱 난쟁이가 신신 당부했지.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그래서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어. 그런데 빨간 사과를 보자 그만 마음이 흔들렸던 거야.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 사과들을 빨리 팔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노파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야. 딱 한 입 베어 물었어. 붉게 잘 익은 쪽을... 달콤한 과즙이 내 입술을 적셨을 땐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기만 했던 나의 눈앞이 아득해졌지.



트로이 전쟁, 그토록 오랫동안일 줄은 몰랐어.

서로 협정을 맺고 끝낼 수도 있었지.

평화의 꿈을 산산이 깬 것은 신들의 꾐에 넘어간 뤼카온의 아들 판다로스의 배신 때문이야.

휴전 상태에서 메넬라오스를 향해 쏜 판다로스의 화살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피의 복수가 시작된 거야. 도대체 왜 싸우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지.

자그마치 십 년 동안.

전쟁이 끝났을 땐 아무도 이긴 이가 없었어.



뭐, 그깟 일로 세상이 망하겠어?

그런데 정말로 그깟 일로 세상이 망하기도 하더라.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몰라도 기왕에 한 약속이라면 지켰어야지.

약속을 깨는 것이 비책이 될 순 없잖아.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는 것을 전략이라 해서는 안되잖아.

그 때문에 이 세계가 또다시 절멸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어서는 안 되는 거지.




암탉과 수탉이 호두나무가 있는 산으로 놀러 갔다.

"누구든 호두를 먼저 찾게 되면 혼자 먹지 않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함께 나눠 먹는 거야. 사이좋게."

둘은 망설임 없이 약속했다.


잠시 후 암탉이 먼저 호두를 찾아냈다. 알맹이가 꽉 찬 호두가 어찌나 흐뭇하던지 얼른 먹고 싶어졌다. 약속 따위는 돌아선 순간 잊었다.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고는, '수탉이 눈치채기 전에 먹어치워야지.' 능숙하게 호두 껍질을 까고는 냉큼 삼켰다. 헉! 목에 걸렸다. 알맹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목을 움켜쥐고 쓸어도 보고 켁켁거려도 보았는데, 도무지 목구멍에 딱 걸린 호두 알맹이가 꿈쩍 않는다. 점점 숨이 막혀 왔다.

"수탉아, 수탉아, 빨리 나한테 물 좀 갖다 줘. 그러지 않으면 나는 숨이 막혀서 죽을 거야."

암탉은 땅바닥에 드러누워 두 발을 버둥이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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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의죽음01.jpg <종이 위에 연필>

그 처절한 외침을 들은 수탉은 곧장 우물로 달려가서 말했다.

"물 좀 줘야겠어. 언덕에 누워 있는 암탉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하지만 우물은 곧장 물을 내줄 생각이 없다.

"그럼 먼저 새색시에게로 가서 붉은 비단을 가지고 오렴."

수탉은 새색시에게 달려가 사정했다.

"붉은 비단을 주세요. 목구멍에 호두 알맹이가 걸린 암탉이 언덕에 누워 있는데, 암탉에게 물을 주려고 우물에 가니까 우물이 저더러 비단을 갖고 오라네요."

새색시 역시 곧장 비단을 내줄 생각이 없다.

"그럼 먼저 버드나무 가지에 걸린 내 화환을 가지고 오렴."

어쩌겠는가, 버드나무를 향해 냅다 뛰었다. 과연 가지에 걸린 화환이 있었다. 수탉은 화환을 새색시의 붉은 비단과 바꾸고 다시 붉은 비단을 물과 바꾸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암탉에게로 달렸다. 마침내 쓰러져 있는 암탉에게 물 한 그릇을 내밀었을 땐 이미 암탉은 죽어 있었다.


수탉은 비탄에 빠졌다. 약속을 어긴 암탉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물 한 그릇 내어주는데 그렇게까지 많은 퀘스트를 제시했던 그들을 원망했을까? 그도 아님 더욱 빠르게 뛰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수탉은 너무 슬퍼 꺼이꺼이 울었다. 그 소리가 숲 사방으로 퍼졌다. 그 바람에 숲의 동물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함께 슬퍼해주었다.


그들 중 여섯 마리의 생쥐는 암탉을 무덤까지 싣고 갈 마차를 만들고 그들 스스로 기꺼이 마차를 끌 것이라 했다. 생쥐보다 훨씬 크고 힘센, 곰이며 사자와 늑대도 있었지만 함께 울어 주었을 뿐 다른 도움은 주지 않았다. "암탉을 묻으러 가자." 수탉은 죽은 암탉을 실은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마차를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섯 마리 생쥐들을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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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는 거냐?"

도중에 만난 여우가 물었다.

"암탉을 묻으러 가는 길이야."

"나도 같이 타고 갈까?"

"좋을 대로. 하지만 너는 무거우니 뒷자리에 앉아라. 앞에 앉으면 내 말들이 견뎌내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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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의죽음02_02.jpg <종이 위에 연필>

마차에 타고 함께 가겠다고 나선 이는 여우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만난 늑대, 곰, 사슴, 사자 등등...

숲에 사는 온갖 짐승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여섯 마리 생쥐가 끄는 마차에 말이다. 어쩐지 덩치 큰 동물들 꼬락서니가 불길하다. 얼마 못 가서 개울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이를 어쩌나 당황해하는 그때 개울가에 누워 있던 지푸라기가 말했다.

"내가 드러누울 테니 나를 타고 건너가라고."

옳지! 하고 여섯 마리의 생쥐가 지푸라기 위로 뛰어오르자마자 지푸라기가 물에 잠기더니 그와 동시에 생쥐들 모두 물속에 빠져버렸다.


"쯧쯧"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뜨거운 숯조각이 말했다.

"크기가 나만큼은 되어야지. 자, 내가 드러누울 테니 나를 타고 건너라고."

그러더니 벌러덩 물 위에 드러누웠다.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는 그대로다.

"피시식"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렸다.


이번에는 그 옆에서 이 소란을 지켜보던 돌이 불쌍한 수탉을 돕겠다고 나섰다. 돌이 들어 눕자 수탉은 물에 빠져 죽은 생쥐들을 대신해 직접 마차를 끌고 개울을 건넜다. 가까스로 맞은편 기슭에 닿게 되자 수탉은 암탉을 들어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구경꾼들은 여전히 마차 뒷자리에 앉은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마차를 땅 위로 옮기는 것을 도와 달라 부탁하려던 그 순간, 마차가 슬금슬금 뒤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물속으로 미끄러져 가라앉고 말았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던 그들도 몇 번 허우적대다가 꼬르륵 다시는 물 위로 나오지 못했다. 이제 세상에 남은 것은 죽은 암탉과 수탉뿐이다.


수탉은 홀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파낸 땅에 암탉을 묻은 뒤 그 위에 봉분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봉분 위에 앉아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자기도 따라 죽었다.

그리하여 모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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