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짐에 익숙해지다

다섯 번째 그림책(5)

by 이경아

베일 듯 딱 떨어지는 선.

금방이라도 찌를 듯 덤비는 날카로운 각.

티끌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순백.

단색의 차가운 타일 바닥.

나도 한때는 이런 것을 좋아했다.

이도 저도 아니게 불분명한 것을 꺼려하는지라

싫고 좋음이 분명했다.

어떤 이는 이런 분위기를 모던하다라고도 하던데...

그건 잘 모르겠고 분명 이런 느낌에 끌리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 더 이상의 색깔은 필요 없는 양

흰색과 검은색만을 선호하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옷장을 열어보니 온통 검은색과 흰색옷 투성이더라.

사들이는 물건들 역시 그랬다.

그래서 이게 나의 취향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웬걸.

진분홍색이 끌린다. 주황색이 너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잘 어울린다.

검은색과 흰색 옷을 입으면

어딘가 모르게 초라해 보이고 아파 보이는데

촌발 날린다 비웃던 꽃분홍색이 내 얼굴에 생기를 돋아준다.

그러니 형형색색의 옷들로 서랍을 채울 수밖에.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더니

변했다. 내가.

나이가 들었음이지.

넙죽넙죽 넉살도 좋아지고... 그래서 빈말도 하게 되고.

똑 부러지게 폐부를 찌를 듯 날카롭던 내가.

세상 바른말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꼿꼿하던 내가

싱글싱글... 능글능글해졌다.

그닥 동감하지 않아도 네... 네...

그림속에 낡은 물건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요즘의 나의 취향때문일것이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반짝반짝 신상보다는 손 때 묻어 낡은 게 더 좋다.

철 따라 유행 따라 때때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을 구입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오래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더 좋다.

오래 쓰면 질리는 나이가 아니라

시간을 머금은 물건이 좋은 나이가 되었나 보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물건보다는

여기저기 생채기 난 나의 헌 물건이 더 좋다.


아마도 난 이제 낡아짐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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