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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쟁이 Jan 29. 2023

어떤 삶

당신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모든 기억을 지웠다.

어쩌면 그 편이 나았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훨훨 떠났다.

사진 속 그녀는 진분홍 블라우스에 진분홍 립스틱을

바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보글보글 펌도 과하지 않아 자연스러웠다.

언제 적 사진일까? 낯설지 않다.

분명 떠나는 그 길이 솜털처럼 가벼웠을 것이다.

기억이 없으니

발뒤꿈치를 붙잡는 안타까움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1930년대 후반 어드메쯤엔 가에

그녀는 첫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겠지.

그녀의 세월이 질곡의 시간일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남편은 까탈스럽기로 둘째가라면

세상 서러워 펄펄 뛸 사람이었다.

하루 세끼 따스한 밥은 기본이고

같은 반찬 두 번 상에 오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집 밖에서 밥을 먹고 오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결혼식이나 상갓집에 가서도 밥은 먹지 않았다.

밥은 반드시 집에서...

그녀의 음식 솜씨는 늘 장안의 화제였다.

손이 크기도 했거니와 맛과 그 모양,

정갈함까지 일품이었다.

남편은 유난히 깔끔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쓸고 닦아야 했다.

시부모님 모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

철저하게 전업주부로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그녀의 남편은 복덕방과 더불어 세탁소를 운영했다.

당연히 수시로 세탁소 일을 도와야 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시동생이 죽었다. 왜 죽었는지는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내 부모님께 들었는데...

아무튼 그는 남매 둘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남편을 잃은 동서는

남매 중 동생이었던 딸만 데리고 집을 나갔다.

코 흘리개 아들을 그녀의 집에 남겨 둔 채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그 조카도 키웠다.

이미 그녀의 자식이 넷이었지만 원래 그녀의 아들이었던 것 마냥 군소리 없이 키웠다.

때때로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차별한다라는 소릴 듣기도 했지만

꾸역꾸역 삼켰다.

다행히 어릴 적 속깨나 썩이던 그 조카는

그래도 사춘기 지나 철이 들면서

공부도 하고...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도 하고

그 뒤 좋은 짝 만나 결혼도 했다.

그 뒤엔 언제나 동분서주했던 그녀가 있었다.

집안 일과 남편 뒤치다꺼리 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벅차게 바쁜 그녀였지만

아이들 교육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심지어 조카의 교육까지도...

그야말로 극성 학부모가 되어 학교를 누비고 다녔다.

아이들은 늘 언제나 백화점 옷을 사 입혔다.

그렇게 아이들을 귀하게 키워냈다.


큰 딸은 여고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라는

부모님의 권유에도 대학엘 가지 않았다.

대신에 연애를 했고 결혼을 했다.

탐탁지 않았던 신랑감이었지만 자식이 좋다니 별수 있나.

새 식구가 된 사위는 툭하면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사정하여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사위의 사업 밑천을 대었다.

사위는 수시로 말아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딸이 두 어린아이를 데리고 한 밤중 집으로 가는 길

횡단보도를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 아이 중 딸아이는 20여 일을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설사 살아난다 해도 예후가 좋지 못해서...

그런데, 기적처럼 아이가 깨어났다. 모든 것이 정상인 듯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총명함을 잃었다.

큰 딸은 그 사고로 내내 다리에 철심을 박고 살아야 했다.

그 이후 툭하면 사업을 물 말아먹기를 밥 먹듯 하던

사위는 사무실 여직원과 바람이 났다.

그 후 큰 딸은 이혼했다.

불편한 몸과 아직 어린 두 아이가 있었으나

그래도 큰 딸 뒤엔 듬직하게 버티어 주는 엄마가 있었으니

많이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큰 딸은 돈을 벌러 다녀야 했다.

그래서 어린 두 아이의 양육은 그녀의 엄마 몫이었다.

어찌어찌해서 또 정성껏 그녀는 손자와 손녀를 키워냈다.

시간이 가니 절로 크는 것처럼도 보였다.

총명치 못한 손녀와 손자가 성인이 되고 손자는

대학 졸업 후 번듯한 직장에 취업도 했다.

다 되었구나 싶은 찰나 그녀의 큰 딸이...

손주들의 엄마가...

목을 맸다.

그녀는 자기 자식의 장례를 지켜야 했다.


그녀의 장남은 그녀에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고 자랑이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었던 기억이 바로

그 장남이었으니까.

장남이 하는 일은 뭐든 잘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장남은 대학 졸업 후 기업에 취업했다가 다시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되었다.

장남 역시 부모가 달가워하지 않는 짝을 데려왔다.

연상의 여인... 아마 서너 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그 결혼을 허락했다.

결혼 후에는 공무원 월급 박봉이라며 대부분의 생활비를 대주었다.

며느리는 떡 두꺼비 같은 손주 둘을

두어 살 터울로 낳아주었다.

그녀는 손주들의 돌 상은 물론이고 매년 생일 상을

상다리 휘어지게 손수 차려주었다.

손주들이 학교에 입학하자 그녀는 열혈 할머니가 되어

생일이면 늘 학급에 떡을 돌렸다.

손주들이 초등 고학년이 되자 며느리는 돈을 벌겠다며

직장엘 다녔다.

세상 참 좁다. 소문이 돌았다.

며느리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그녀는 직접 며느리의 뒤를 밟았다.

마침내 현장을 목격했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며느리가

아들의 집을 담보로 1억 이상 대출을 받고도

추가로 더 대출을 받아

외도의 상대였던 남자에게 건넨 뒤였다.

들리는 말로는 그 일로 장남인 아들은

살던 아파트를 날렸다 했다.

그리고도 또 다른 빚을 남겼으니 그 정리를 위해

결국 아들과 며느리는 이혼했다.

또다시 어린 두 손주는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매일을 한결같이 아들 집을 드나들었다.

어린 손주들을 돌봤으며 아들의 식사를 챙겼다.

그 힘든 시간들도 가더라.

어느 날 설 명절에 그녀가 우리 집에 왔다.

때마침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어

그녀의 늘어지는 손주 자랑을 들었다.

군대 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듯싶은데

벌써 제대하고 대학도 졸업하고

입이 떡 벌어지게 좋은 직장에 취직도 했단다.

손주 둘 다...

나는 한껏 그녀를 추켜주었다.

나중에 나의 엄마는 그 모습을 못내 못마땅해했지만,

나는 그러지 마시라 했다.

저렇게 자랑이라도 하셔야 사시지...

그게 쉬운 일이냐. 아무나 못한다 하면서...


그녀의 자식 넷 중 셋째와 넷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큰 딸과 장남이었던 아들만큼은 아니기에

더 이상 적지 않으련다.


손주 둘을 대학에 보내는 사이 그녀의 남편은 암에 걸렸다.

그렇다. 이젠 남편의 병 수발도 그녀의 몫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70대 중반의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큰 딸의 두 아이도 시집, 장가보냈다.


남편 죽고 그 후로 10년이 지났다.

이제 다 끝났다.

큰 아들 새 집 장만도 도왔겠다,

이제 손주들 독립하는 것만 보면 되겠구나 싶은 찰나.

모두가 단순한 섬망이겠거니 했는데 치매가 왔다.

자식들 직장 따라 내보내고 혼자 사는 장남과

넷 중 비교적 평탄한 결혼 생활을 하는 막내딸이

번갈아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하지만 지워지는 기억을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위 앞에서도 옷을 벗고 오줌을 누고 똥을 누었다.

밤새 잠 안 자고 돌아다니는 것은 기본이었고

혼자 집에 둘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결국 3년 전 요양원으로 모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홀연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생일날.


그녀는 나의 외숙모이다.

워낙 일찍 세상을 뜨셔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내게 외갓집은 정말 특별했다.

그건 분명 외숙모 때문이었다.

외숙모는 당신의 자녀들뿐 아니라

나에게도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나의 부모를 그다지 의지하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약했고 미덥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스스로 서야 한다 생각했다.

그래도 외숙모는 의지가 되었다.

집 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나는 쪼르르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26-0459'  잊혀 못할 전화번호.

외숙모는 나의 전화를 받고

곧장 우리 집으로 와주곤 하셨다.

키도 크고 골격도 크고 목소리도 큰,

도통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경상도 아주머니.

나를 무척이나 아껴 주셨던 외숙모.

당신 자식들과 시동생의 자식까지 건사하느라

힘에 부치고 또 부치셨을 텐데

외숙모는 자주 나를 불러 맛난 거 해 먹이고 재우고

또 이쁜 옷 사 입혀주셨다.

내가 결혼할 때는 그 어렵고 번거로운

폐백 음식을 손수 장만해 주셨다.

동네방네 자랑스러운 조카라며 자랑도 잊지 않으셨다.

외숙모는 시누이의 딸도 그리 살뜰하게 챙기셨던 거다.

그때는 몰랐다. 그 삶이 얼마나 기막힌 삶인지.

내가 반백살을 살아내고 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를 마주해야 하는 요즘에서야 알겠더라.

어찌 살아내셨을까?

외숙모에게 시누이인 우리 엄마는

외숙모가 툭하면 불평한다고 듣기 싫어라 하셨다.

사람이 좋은 말만 해야지 시끄럽다고...

그런 엄마에게 나는 외숙모 편을 들고는 했다.

"엄마, 아무나 못 살아요. 그 삶.

그 불평도 하지 않으면 돌덩이지 사람이에요?"


외갓집의 외숙모가 돌아가셨다.

아직도 귓가엔 그 목소리가 쟁쟁한데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되었다.

다행히 외숙모가 요양원에 입소하시기 전

그래도 정신이 왔다 갔다 할 무렵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찾아뵈었다.

남편과 아들도 함께 동행했다.

그때는 같은 말을 반복하시기는 했지만

나의 모든 일을 다 기억하셨다.


설 명절 직후라 그런지 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한참을 언니 오빠랑 이야기 나눴다.

그런데, 그 자리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더라.

작은 외삼촌의 아들. 나보다 두 살 위의 오빠다.

어렸을 때 또래 마냥 함께 뛰 놀았던 오빠다.

(큰 언니와 큰 오빠와는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당신 속으로 낳지 않았지만 정성으로 키웠던 아들.

상주 명단에도 올라 있었지만 오빠는 첫날 오지 않았다.

장례 후에 넌지시 물어보니 둘째 날 밤에야 왔단다.

직장 일 때문에...


당신 자식 일이야 당신의 핏줄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시동생의 아들까지 키워야 했던 외숙모의 삶은

더없이 서러웠을 터다.

혼내면 혼낸다 주변에서 얼마나 말이 많았을까?

우리 엄마가 그런 소리 하는 것도 나는 여러 번 들었다.


오빠가 자식을 낳아 키워보지 않아서

그 힘듦을 모르는 것일까?

(오빠네는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생명을 키워내는 그 어려움을...

어떻게 어머니의 죽음이 아닌

큰 어머니의 죽음으로 퉁 칠 수 있냔 말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 없으나

마지막 가시는 길 그래서는 안되었다라는 생각과 함께

옛말에 그래서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 했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든다.


그럼에도 우리 외숙모가 잘하신 일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 한다면

조카를 끝까지 키우신 일이 아닐까 싶다.


외숙모... 그곳에서는 모두를 잊고

솜털처럼 가볍게 사세요.

이곳 걱정이랑 하시지 마시고...

감사했어요. 외숙모...



이곳은 기억의 성에 보관되어 있는 기억을 태우는 곳이다.(현재 그리는 그림책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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