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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쟁이 Feb 12. 2023

정월 대보름

나의 엄마(3)

빅뱅의 순간에 입자의 위치나 장의 값이 조금만 달랐어도 당신과 나, 인간, 지구, 그리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엔드 오브 타임 (브라이언  그린)


엄마 떠나셨던 일요일...

다시 일요일이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른 새벽 눈을 떴다.

그리고 그날을 복기한다.

다시 해볼 어쩔 도리가 없음에도 무엇을 놓쳤을까?

리셋의 시점을 찾는다.

어디로 되돌아가면 엄마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눈시울이 시큰 뜨거워진다.

내가 지금 이토록 세세하게 적고 있는 까닭이 어쩌면은

당위에 대한 근거를 찾고자 함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2023년 2월 5일 일요일 저녁 6시 20분 무렵.

그리고 있던 그림을 완성했다.

시간을 보니 저녁 먹을 시간.

병원에 계신 엄마도 지금쯤 저녁을 드셨겠구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저녁 식사 나올 시간 아닌가요?"

"맞아."

"엄마는 저녁 드셨어요?"

"아니 못 먹었어."

"왜요?"

"죽이 나왔는데 엄마가 먹지 못하겠대.

나보고 먹으라 해서 방금 내가 먹었어."

"왜 못 드시겠대요? 드실만하실 테니 식사가 나온 거잖아요. "

"엄마가 죽을 달라고 했는데 못 먹겠대."

"왜요... 입맛이 없어도 드셔야죠. 아빠, 엄마 바꿔 보세요."

"어... 엄마 없어. 잠깐 어디 갔어."

당신이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겸연쩍으셨는지 껄껄 웃으셨다.

나는 그게 솔직히 답답했다.

팔순이 코 앞인 노인에게 자세한 정보를

원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겠지만...

"어디요, 밥도 못 드시겠다는 분이 어딜 가셨어요?"

"몰라, 간호사들이 검사하러 데려간 모양이다."

"네? 다 저녁에 무슨 검사?"

"몰라."

"아빠, 조금 있다 다시 전화할게요. 혹 그전에 엄마 돌아오시면 전화 주시고요."


전화를 끊고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한숨을 쉬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저녁상을 물리고 다시 전화하려고 하는 순간

벨이 울렸다. 아빠였다.

"아빠! 엄마는 오셨어요?"

"빨리 내려와라. 엄마 가셨다. 의사들이 빨리 오란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빠는 떨리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아빠, 옆에 의사 있어요? 바꿔주세요."

"안녕하세요! 저 큰 딸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어머님이 심정지 상태입니다.

어머님이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히신 거 아시죠?"




5~6년 전쯤 엄마 집에 갔을 때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를 작성하셨다고 하시면서 카드를 보여 주셨다.

아빠도 함께 하셨단다.

그뿐 아니라 장기 기증 신청도 하셨다고 했다.

기분이 묘했다.

애써 태연하게...

"엄마 그런 제도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노인복지회관에서 다 교육받았지.

그거 자식들 죽이는 거야. 그러면 안돼.

갈 때 되면 가야지. 가볍게 가야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그리 알아."

엄마는 작년 초까지 거의 20여 년 동안 '독거노인 방문'

봉사 활동을 하셨다.

홀로 되신 어르신 집을 방문해서 이따금 말벗도 해드리고

가끔 집도 정리해 드리고... 그분들의 삶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을 하셨다.

월 30만 원을 받고 주 3회 하루 4시간 정도 활동을 하셨다

(처음 10여 년은 월 20만 원 받았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엄마가 그 활동을 그만하셨으면 했다.

엄마가 월 30만 원을 벌고자 그 일을 하신다 여겼기 때문

 에 아주 심하게 반대했다.

그 일 때문에 엄마가 병원에 자주 입원 하시게 된다 생각했다.

실제로 엄마는 오전에 활동을 다녀오시고

오후에 수혈받으러 가시곤 하셨다.

줄기차게 말리는 나에게 어느 날 엄마가 그러시더라.

"경아야, 돈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노인들 방문할 때

뭐라도 사 들고 가면 돈이 더 들어. 그런데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냥 죽는 날 기다리는 거잖아.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해. 답답해. 사는 게 의미가 없잖아."

그랬다. 일주일에 3번 활동을 하시는 엄마는 느리고 느린 걸음으로 아주 바쁘게 사셨다.

금방 일주일이 가고 또 한 달이 가고...

그리고 통장에 돈이 모아지면 삼 남매 계좌에 30만 원씩 입금하시곤 했다.

뜬금없이 입금된 돈이 자식들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다.

그 돈을 보내기 위해 엄마 아빠는 은행엘 가셨을 거고

번호표를 끊고 한참을 기다려 창구 직원에게 송금을 부탁하셨을 것이다.

게다가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던 부모님이

그럭저럭 살만한 자식들에게 용돈을 보내주신다니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입금된 사실을 알게 되면 득달같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고맙다는 말보다는 화를 냈다.

그래도 기분 좋다 하셨다.




"알고 있어요. 엄마가 거부 의사 밝히신 거.

하지만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바로 어제도 엄마를 뵈었고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걸었어요.

좋아지실 수도 있잖아요.

가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응급실에 들어오셨을 때도

거부의사 밝히셨어요."

"아니에요. 해 주세요."

"그럼, 호흡기랑 중환자실도요?"

"네.... 저는 지금 용인이고요.

대전에 사는 여동생 바로 병원 들어가게 할게요."

전화를 끊고 동생들에게 즉시 연락했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화기 넘어 남동생은 격앙했다.

KTX로 바로 내려갈 테니

제발 엄마 좀 잡아달라고 울부짖었다.

다시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다급한 움직임과 소리가 들렸다.

흡사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었던 소리들이다.

'띠이-------'

"가망 없어요."

"아니요, 그래도 살려주세요. 제발 잠시라도..."

"최선을 다해볼게요."

대전으로 내려갈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혼돈이다. 혼돈.

이럴 때는 엄마에게 물어봐야 한다.

평소 엄마를 의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이런 일이 생겼다고. 전화드려야 했다.

그런데 전화를 할 수가 없다.

마른 눈물이 나왔다.

울어야 하는데 울 수가 없다.


일단 아르바이트하러 간 아들을 불러들였다.

남편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빈 집에 혼자 있을 내 고양이 아라를 돌봐주실 분께도

연락드렸다.

아라의 먹을 것을 끼니별로 저울로 계량해서

작은 그릇에 소분해 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나중에 핸드폰의 기록을 보니 30여분 지났다)

벨 소리가 울렸다. 여동생이다.

"언니, 엄마 그만해야 해. 엄마 너무 힘들어.

언니 우리 엄마가....  언니... 내가 그만하라고 했어."

동생이 무너졌다.

잠시 후 남동생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KTX 매진이야. 직접 운전해서 갈 거야.

누나는 천천히 준비해서 내려와."

남동생도 소식을 들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소식을...

"그래, 운전 조심해서 내려가. 나도 바로 내려갈게."

2박 3일간의 짐을 챙겨 내려가야 한다.

가방을 꺼냈다. 무엇을 담아야 할까. 모르겠다.

 (결국 내가 챙겨 간 짐들은 엉터리였다.)

아라는 일단 아들에게 맡겨 놓고 남편과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아들은 그 뒷날 내려왔다.)


차창 밖으로 아주 커다랗고 밝은 보름달이 우릴 따랐다.

엄마는 일 년 중 가장 크고 밝다는 정월 대보름날 밤

그렇게 휘영청 밝은 달을 따라가셨다.


 

잊혀진 기억을 소각하는 성. 이 그림을 완성하고 50분 뒤 엄마의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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