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소리 Nov 19. 2024

머리카락 잡아줄까?

공감의 힘

날씨가 좋아서, 온도가 적당히 차가워서, 점심에 먹을 밥이 이미 있어서, 아니면 어떠한 이유 없이도 그냥 좋은 날이 있다. 기분 탓으로 돌리던 어제의 어두운 감정이 기분 덕에 오늘의 찬란함으로 돌아온다. 길가의 공사 소음은 훗날의 상습 정체를 해결하고, 어제 주문한 식자재는 배송 날짜를 잘못 설정한 덕분에 오늘의 메뉴가 되었다. 아이는 어제 남은 찬이 아닌 새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갔으니, 어제의 탓은 오늘의 덕이 된다. 


좋은 날에는 좋은 영화를 본다. <레이버 데이> 같은 걸로. 


영화 레이버 데이 (Labor Day)

아빠가 살림을 차려 나가고 남겨진 모자(母子)의 이야기가 본론으로 가는 길을 길게 끌지 않아 명쾌했다. 시작과 동시에 바로 본론. 낚싯대에 달린 새 장난감을 만질까 말까 고민하는 고양이에게 낚싯대를 조금씩 멀리 옮기며 서서히 내쪽으로 끌고 오는 전략과 영화의 도입부는 꽤나 닮아있었다. 꼼짝없이 끌려가다 끝까지 보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탁월하다 할 수 있다. 


엄마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대인기피로 한 달에 한번 겨우 마트에 들러 식료품을 구입하지만, 실은 그것마저도 버거운 상태다. 버거운 일상이 이들이게 무한 반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느닷없는 일은 보통의 날에 일어났다. 

마트에서 마주친 남성으로부터 아들은 난데없는 부탁을 받는다. 

"너희 어머니가 차 좀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

낯선 이의 부탁에 아들은 당황하고 엄마는 긴장한다. 엄마는 뒷좌석에 탄 남성에게 목적지를 묻고, 남자는 답한다. 

"너희 집"

 

티브이에서는 살인범이 탈옥했다는 속보가 다급한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얼떨결에 탈옥수를 숨겨주는 신세가 돼버린 모자의 긴장감이 화면에 가득하다. 의외로 침착한 탈옥수는 예상외의 세심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찬장에서 꺼낸 통조림과 빈약한 식재료로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 모자 앞에 내미는가 하면, 먹여주기까지 한다. 요리 솜씨에 놀란 모자의 표정에는 여전히 어리둥절함이 바탕색으로 깔려있다. 

남자가 떠나기로 약속한 날짜가 되자 이들은 남자를 걱정하며 만류하기까지 하는데... 남자는 이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계속 머무르게 된다. 오랜 시간 남자의 손길이 없던 집에 고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붕의 누수를 손보고, 깨진 조명을 고치며, 자동차 엔진 오일을 교체한다. 아빠의 결핍이 가져온 남자의 정이 모자에게도 진심으로 전해지고 남자와 이들은 결국 가족이 되기에 이른다.


남성 양육자의 결핍으로 아들은 그를 점점 아빠와 대등하게 여기기 시작하고, 부족했던 남성 간의 공감은 둘 사이의 빈틈을 채운다. 공을 쥐는 법에서 타이어 펑크에 대처하는 법까지 남자는 아이가 원하고 필요한 것을 한수 앞서 알려준다. 실제 아빠가 채울 수 있는 공감의 그릇은 이미 남자로 인해 가득 차고 넘치게 되니 아빠의 존재는 생물학적 존재로만 남게 된다. 

거듭한 나날 속에서, 서로를 향한 이해와 공감을 통해 탈옥수는 아버지로, 남편으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 당신이 못 본 것에 대하여, 당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 내가 못 본 것에 대하여.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 세계 밖에 있는 상대의 언어를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얼마 전 딸아이가 과학 숙제를 함께 하겠다며 학급 친구를 집에 초대했다. 둘은 후다닥 숙제를 마치고 남는 시간은 들어가 놀겠다며 방문을 쾅 닫았고, 내 귀에는 잠시 정적이 이명처럼 이어졌다. 우리 딸을 파자마 파티에 초대하겠다던 아이 엄마의 메시지에 나는 아직 답을 하지 못했다. 곧 6학년에 진입할 아이들이, 특히 남녀가 파자마 파티라니, 아들 엄마의 철없는 제안에 사실 조금은 황당했다. 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문짝을 앞에 두고 자판을 두드리는 백지 화면에 자꾸 오타가 난다. 


문너머에서 아이들은 작게 깔깔대고, 또 한참을 재잘댄다. 나는 군것질을 들고 방문을 조심스레 안으로 밀었다. 아이들은 예쁘게도 책상에 앉아 함께 포스터를 그리고 있었는데, 지난달 머리에 스트레이트 펌을 한 딸아이가 치렁치렁한 머리를 길게 내려뜨리고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머리끝에 물감이 묻고, 또 주전부리에 머리카락이 닿을까 아이 친구의 다정한 한마디가 생각지 못한 터라 놀랐다.

"머리카락 잡아줄까?"


긴 금발머리의 아이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의 긴 머리를 만지며 잠이 들고 위안을 얻었을 그 아이 내면의 솜털로 덮인 순한 아기를 보았다. 엄마의 세심한 성격이 투영된 아이의 따뜻한 제스처는 그 후에 다른 장소에서도 몇 차례 눈에 들어왔다. 사실 그 아이는 학교 생활 초반에 주의력 결핍으로 수업 참여가 쉽지 않았는데, 친구들의 이해와 상담 선생님의 공감과 배려로 아이는 다행스럽게 매년 조금씩 나아졌다. 오히려 지금은 자기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라도 하듯 친구들을 돕고 소통과 공감의 숨은 재능을 발견한다.

"너 어제도 이 옷 입었는데, 오늘도 입었네. 안 추워?" 


누군가는 "머리 잘라!" 하고, 누군가는 머리카락을 잡아준다. 공감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광활하다. 공감이 공감을 낳고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수열처럼 우리가 만들어갈 긍정적 가능성도 무궁무진한 상태로 남아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