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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Nov 10. 2024

소브레메사

빈 접시가 무색한 수다

문득 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 이 마음은 이심전심이 되는지 내가 그런 마음이 들 때면 그들도 그런 듯했다. 이번에도 대장님의 안부 문자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고 떠들썩해진 단톡방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간 어떤 하루들을 만들고 있었는지 개별적으로 안부 묻고 소식은 알렸지만, 이렇게 넷이 모이면 어떤 이는 영화 중 화장실에 다녀온 듯 급하게 그간의 스토리를 듣기도 했고, 다른 이는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들어주기도 했다. 다시 듣든 새로 듣든, 넷 사이에 공통 관심사는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짜는 하필 72년 만의 자이언트급 폭우가 예보된 날이었다. 새벽부터 몰아붙이는 거센 비와는 다르게 우리의 단톡방은 고요했다. 폭우를 핑계로 약속을 취소하거나 미루자는 의견 한마디 남기는 이도 없었다. 무소식은 우리의 만남을 더욱 굳게 확정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레인 코트와 장화를 준비하고, 머릿속에는 이미 지하철 노선 행로를 포함한 시간 계산이 끝났다. 


도착한 그곳은 날씨 덕분인지 인적 없는 외딴섬 같았다. 먼저 도착한 나는 벽을 따라 혹은 창문을 따라 자리를 잡고 앉길 거부하고, 홀 정중앙의 넓은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벨벳재질의 연두색 의자에 하얀 식탁보가 먼발치의 봄을 가까이 당겨왔다. 군데군데 꽂혀있는 꽃장식과 천장에 걸려있는 관목들이 잘 가꾸어진 개인 정원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자아냈다. 하나둘씩 도착하는 우리 소중한 얼굴들은 빗속에 가려진 햇살처럼 환하게 서로를 반겼다.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헛헛한 마음을 돌보시는 큰 언니, 그리고 곧 말레이시아로 발령받아 떠나시는 감사하고 아름다운 가운데 언니, 최근 남편과 떨어져 상하이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강인한 슈퍼 맘 작은 언니. 이제 보니 다 언니들이다. 피보나치수열처럼 뻗어 나는 나이차만큼이나 우리 관계는 황금비를 오래 유지해 오고 있다.   



마침 <레스토랑 위크>여서 좋은 메뉴를 합리적인 가격에 접할 수 있었다. 취향대로 선택한 점심 코스는 넉넉한 그릇에 담겨 양도 가득했다. 1인분인지를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비고 다시 묻기도 했고, 뜻밖의 횡재라도 한 듯 우리는 서로의 접시를 한 데 즐겼다. 


식후 빈 접시를 앞에 두고 우리는 오래 앉아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서로의 일상을 깊이 공감하고 그 와중에 눈물도 한 줄기 지나갔다. 비 오는 날 손님 없이 한산했던 연두색 공간은 감나무 그늘 아래의 평상이고 대청마루가 되었다. 마늘을 까고 시금치를 다듬으며 했을 법한 소소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대단한 메시지 같은 건 없었지만 함께 하고 있는 시간만큼은 소중하고 대단했다.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가운데 언니의 소식에 아쉬움도 잠시, 결국 우리는 다 잠깐 이렇게 스치고 있는 중임을 자각한다. 스치는 찰나를 이렇게 붙잡고 모여있으니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시간인가.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마리야 이바시키나>


언어로 모든 상황과 모든 감정을 나타내기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아니 불가하다고 믿는다. 언어가 남기는 구멍은 생각의 한계를 낳고, 생각의 한계는 언어의 굴레 안에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잃는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내게 없는 것이 다른 이에게 있기도 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어에 없는 표현은 외국어에 있었다. 스페인어를 거의 모르지만 그들의 소브레메사 Sobremesa는 좋아한다. 빈 접시를 앞에 두고 떠날 시간을 급히 계산하지 않으면서 이들 안에 속한 기분을 가만가만 더듬는다. 비어진 물 잔에 물을 더 따르고 따라주기도 하며 우리는 마른 입을 축인 다음 처음으로 거푸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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