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참 많다. 살인자의 기억법, 덕혜옹주, 7년의 밤, 화차, 헝거게임, 하물며 해리포터와 반지의 대왕의 대형 시리즈물까지 원작은 도서다. 언급한 몇 작품처럼 원작도서와 영화가 있다면 도서를 먼저 보는 편이다. 아니,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림 같은 글을 통해 상상 속에 그려보는 주인공의 얼굴과 배경의 빛과 색이 독자마다 제각각이다. 같은 글, 동일한 상황을 보고도 가지각색으로 나타날 수 있음은 우리가 모두 다른 개인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책을 읽은 후, 귀한 이들과 나누는 자리에서 각자의 머릿속에 언어로 그려진 영상을 다시 언어로 재생한다. 누군가에게 의미 없이 지나간 구절이 다른이에게는 인생의 구절이 되기도 했다.
영화 제작자에게도 원작을 통한 자신만의 그림이 있을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을 영상으로 만드는 일은 주관적 의견만으론 만들어질 수 없고 다소 객관성을 띄어야 하기에 대중성을 반영한 그들의 상상은 미디어가 되고 영화가 된다. 책을 미리 읽은 독자들은 영화 영상을 자신의 상상과 부단히 매치해 보며 감상한다. 감상이라기보다 분석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들여 완독한 장편 원작의 내용을 2시간 미만의 영상물에 담는 것은 분명 호락호락한 작업이 아닐 것이다. 곁다리로 치부되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면들이 영상에서 가위로 잘려나가고, 주요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전라도인이 맛보는 서울 김치 같은 느낌이다. 명쾌하고 시원하기는 하지만 진한 깊이가 없다. 원작소설보다 뛰어난 영화가 있을까 독서인들과 고민하며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토픽에 주관적인 의견이 있을 수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생각해 낸 이가 없었다.
찾았다. 있다. 원작보다 나은 영화.
십여 년 전 감동적이게 봤던 그 영화를 얼마 전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오랜 질문의 답을 찾아 기뻤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갯츠비를 보았을 때만 해도 나는 여전히 소설이 좋았기에 그의 작품이 답이 될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명작 중의 명작이자 원작을 훨씬 뛰어넘는 영상미를 담고 있다. 원작이 단편이었기에 작은 소설 프레임에 담기에 주제가 거대하여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단편집에 담긴 벤자민의 일생은 영화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해 영화의 가장 기초 토대의 역할 그 이상의 디테일은 주지 못했다. 원작의 본래 이름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에서 보듯, 원작의 내용은 그 기이한 시간에만 머물러있다. 영화는 그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했다. 시간과 젊음과 늙음에 대한 인생 전체적인 통찰을 담아낸 영화는 주연배우의 외모와 연기를 제외하더라도 원작을 거뜬히 뛰어넘는 스토리를 창조해 냈다.
벤자민과 그의 연인 데이지의 아름다운 시간
여기에 늙어가는 시간을 사는 사람과 젊어가는 시간을 사는 사람이 있다. 벤자민과 그의 애인 데이지는 인생의 40대 중반을 즈음해서 서로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있다.
데이지: "내가 주름이 있어도 사랑할 거야?"
벤자민: "당신은 내가 여드름이 있어도 사랑할 거야?"
영화 초반에는 어리고 젊은 데이지를 따라다니는 중노년의 벤자민을 한데 묶어 자주 등장하는 어색한 투샷은 보는 내내 안타깝고 불편했다. 그들의 마음이 같을 수 없고, 그들을 보는 이들의 시선 또한 고울 수 없다.
이야기는 벤자민이 리즈시절의 브래드핏 그대로의 모습이 될 때 비로소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팽팽한 젊음으로 돌아온 벤자민의 외모에서 탄성이 나오는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이 황금 같은 둘만의 시기는 봄처럼 야속하게 흘렀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건 없었다. 시간은 흘러 여드름이 난 소년을 돌보는 중년의 데이지가 등장한다. 반항심으로 무장한 벤자민을 바라보는 데이지의 눈빛이 학부모의 그것과 다른 무엇이 있어 슬프다. 아이는 유아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치매를 앓기 시작하는데 걸음마와 포크 쥐는 법을 가르치는 노인 데이지의 모습에 눈물이 터진다. 뽀얗고 보드라운 솜털의 작은 육체를 입고 조용히 눈을 감는 벤자민의 마지막 순간에 말로 이를 수 없는 허탈감과 슬픔과 막막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늙으면 죽어야지.
늙어서 배우면 뭘 해.
어릴 적 여기저기 어르신들에게서 자주 듣던 말이 늙음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키웠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듯이, 이와 비슷한 의미로 영화 속의 68세 엘리자베스가 영국해협을 건넌 후의 인터뷰에서 짧은 한마디를 남겼다.
"Anything is possible."
주변국에서 70이 넘어도 대통령에 당선이 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삶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지 모른다. 젊음과 늙음, 인생을 논하기에 내 나이가 주제넘을 수 있으나 살아온 게 이것뿐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을 그저 말할 뿐이다.
데이지: "나는 늙는 게 정말 싫어."
벤자민: "나는 늙는 것에 대해 그렇게 생각 안 해."
크게 울린 벤자민의 한마디. 젊어가는 일도 늙어가는 것과 같이 싫을 수 있었다. 결국 둘 다 변화에 대하는 반응일 텐데 어느 쪽으로나 결국은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를 싫고 좋음으로 구분하기는 애초부터 의미가 없다. 이미 늙어본 벤자민은 자신의 사라진 주름살과 흰머리가 죽도록 그리울 수 있다. 그의 말속에 늙음이란 것도 젊음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무거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올해도 20일여 남짓 남았다. 빗발치는 새해인사 속에 나이를 한탄하는 이가 매년 있어왔다. 나이듦에 집중하기보다 더 익어가는 자신에 집중하면서 행복을 꼭 붙들어두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젊음과 늙음, 양쪽 모두 영원하지 않다.영원하지 않은 매 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2025년에는 주변에 많아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