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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Jul 17. 2024

말보다 진심이 더 크다면

아리송한 나라의 좌충우돌 생존기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분.

인연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잣대가 있다면 얼마나 긴 눈금과 짧은 눈금이 필요할까. 옷깃정도 스친 인연과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의 천륜을 각 극에 하나씩 두고 인연의 눈금을 잠잠히 헤아려본다. 일생을 거쳐 이어온 소수의 오랜 인연과 아쉽게 흩어진 다수의 인연을 생각해 본다. 연분은 운명과도 비슷한 것인데, 어디까지나 연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인연은 이어진다. 옆나라 중국도 한 때는 우리와 문화를 공유하던 사이이기에 이런 개념이 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중국은 인구 대국이다. 인구가 많아도 너~무 많다. 때문에 인사가 만사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내 사람과 남을 가려내고 각자의 인맥의 바운더리 안에서 작은 품앗이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영역 안의 인연들은 가족만큼이나 친밀하고 서로의 모든 대소사를 관여하며 오래오래 만난다.

 

영역은 구분짓는 기준이 있는가? 있다. 인맥은 크게 두 개의 바운더리로 이루어진다. 나를 원의 중심에 두고 콤파스로 원을 하나 그려 그 안에 가족을 가장 가까운 관계로 정립한다. 콤파스 다리를 조금 벌려 이번에는 더 큰 원을 그려 그 안에 친구를 들인다. 작은 원과 큰 원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얄짤없이 '남'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 경계는 너무나 확실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하다. '남'으로 구분되면 일단 도움을 주고받거나 교류하지 않는다. 최소한 친구의 영역 안에 들어왔을 때 서로 주고받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남편에게 들은 에피소드 한 조각이 생각난다. 중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라이터가 없었다. 옆에서 맛있게 한대 피우고 있는 한 남성에게 묻는다. 라이터 좀 빌릴 수 있나요? 돌아온 답은 그를 당황하게 했다.

내가 널 아니?

네가 누군데 나에게 감히?의 다른 표현. 이들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친절함과 배려를 기대할 수 없다. 남을 의식할 이유도, 잘해줄 이유도 없다 계산은 우리가 유독 중국인이 무례하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중국에 거주한 지도 십여 년이 지났다. 국가를 구성하는 최대 다수 즉, 내국인의 삶이 그 중심에 있고, 모든 인프라는 대다수의 편의에 맞춰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외국인으로서의 삶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내국인에게 너무 쉽고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 그렇지 않다. 화가 나도 화를 내지 못하는 상황과 권리를 내세워봤자 커다란 언어 장벽과 외지인이라는 신분 앞에서 이길 수가 없다. 지고, 포기하는 삶이 익숙해지는 것이 최선이고, 싫으면 떠나야 된다. 중국 생활을 갓 시작한 당시, 수도세를 제때 내지 못해 단수가 될 위기가 있었다. 고지서를 들고 찾아간 납부 장소에서 행정 직원과의 사이에서 쏟아지는 중국어의 홍수에 질식하여 여러 번 정신을 놓았다. 아이가 어릴 때 열이라도 나면 한국의사를 찾으러 다녀야 했다. 보대껴 우는 아이를 안고 탄 택시 안에서 기사와의 소통 또한 녹록않았다. 도움을 청할 용기도 언변도 부족했지만 선뜻 도와주려고 하는 이도 없었다. 인맥이 가난했다.




아이를 로컬 유치원에 3년 동안 보냈다. 유일한 외국인 원생이다 보니 아이의 소통과 생활에 염려가 되었지만 그 맘때 다른 아이들도 비슷비슷했기에 예상보다 쉽게 적응했다.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등하원 시키며 만나는 엄마들 무리가 생겼고 그들은 나의 유일한 인연이 되었다. 다섯 엄마들의 무리는 자연스레 단톡방 안에서 아이들의 이야기와 일상을 나누며 우리라는 바운더리를 튼튼하게 갖춰갔다. 엄마들의 우정은 아이들의 우정에 영향을 미쳤고, 아이들의 우정이 엄마들의 결속에 한 몫했다. 새해를 맞이할 때 잊지 않고 선물을 챙겼고, 아빠들도 종종 만나 원탁에서 백주잔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서로를 친구의 바운더리 안에 안전히 정착시켰다.


이들 무리에 소속된 후의 삶은 이전과 180도 달라졌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중국어 슬랭과 인터넷 용어들을 배웠고, 잦은 만남으로 여름에는 더운 날씨를 시원하게 날려줄 매운 음식을 먹으러 다녔고 겨울에는 옷에 훠궈 냄새가 빠질 틈이 없었다. 로컬맛집과 쇼핑 스폿을 찾아다녔고 유치원 하교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중국인들은 인간관계에 진심이다. 내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끝까지 챙긴다는 의리가 그들 삶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내가 한 번은 학교 도서관 사서에 이력서를 낸 적이 있다. 월급이 높지 않은 만큼 업무 강도가 지 않아 육아와 병행할 수 있어 지원한 자리였다. 이를 알게 된 우리 왕언니는 인맥을 동원해 나를 그 자리에 취업하도록 도와주었다.(중국에서는 흔한 일임을 이해해 주시길) 방학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일정이 있어 취업은 무산되었지만 그 당시 왕언니의 적극적인 액션에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한 번은 몸이 안 좋아 수술을 해야 했다. 타지에서 코로나 봉쇄까지 겹쳐 병원이나 의사를 찾기가 불가능처럼 어려웠다. 그때 한 친구가 의사 인맥을 동원하여 적기에 수술하고 치료까지 순조롭게 받을 수 있었다. 막막하고 두렵던 그 당시에 친구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난관을 헤쳐왔을지 캄캄하다.




장마가 시작되기 바로 전 화창한 날에 친구들을 한국에 초대했다. 친구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금세 날아왔다. 그동안의 고마움을 갚을 좋은 기회다. 받기만 하고 갚을 기회 없음에 안타까워했던 시간이 길었다. 잘 곳을 꾸미고 한정식을 예약하고 9인승 차를 예약했다. 준비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해 줄 수 있음에 감사했고 와주어서 고마웠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여 네가 소홀해도 다 이해한다."

"이렇게 많이 준비하면 다신 안 온다!"


고맙다는 말 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말로 하는 표현에 진심을 모두 담기 어려울 때, 고맙다는 인사는 때론 어색한 거리감을 남기기도 한다. 우리가 친구로 정해진 이상, 어떠한 감사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중국어에 谢谢(시에시에)하는 감사의 표현에 화답하는 不客气!(천만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不뒤에 따라오는 客气는 직역하면 '손님 역할을 하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앞에 아니 불(不)을 써서 '손님처럼 그러지 말라'라고 하는 이 표현은 달리 말해 '우리가 남이가!'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과 어울려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제는 조금씩 보인다. 말로 하는 감사보다 서로에게 안겨준 호의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는 것이 감사를 대신할 수 있다 것을.

남에게는 당연한 감사 인사일지라도 내 사람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인사.

오히려 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던 거리가 선명해져 불편한 인사.

잘 먹고 잘 놀다가는 것으로 감사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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