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으로 아빠와 아옹다옹할 때가 있다. 검색창에 한번 넣어보면 될 일을 기어이 입씨름하는 것이 부전여전이다. 내가 틀린 적이 있기에 매 여름마다 의기양양하게 물으시는 문제를 올해도 어김없이 물으신다.
"밖에 우는 것이 매미냐, 쓰르라미냐"
네네,
매미는 매애앰~~~ 하고 쓰르라미는 맴맴합지요.
검색창에 물으니 쓰르라미는 매미의 한 종류인데 울음소리가 일반 매미와 차이가 있다고 한다. 매미라고 다 같은 매미가 아니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무더위다. 지난 정월대보름에 더위를 열심히 팔았건만 내 더위는 결코 네 더위가 될 수 없었다. 무심코 지나는 시선에 달력의 반가운 두 글자가 들어온다. 입추(立秋)!
"와! 오늘 입추네요?"
"말복도 안 지났는데 무슨 입추냐"
허허허.
하지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네 번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 혹은 그 이후 첫째 경일을 말복(末伏)이라고 해요.[나무위키]
입추는 지나야 말복이 오거든요?!
중국에서도 늦더위, 즉 입추 무렵의 무더위를 '가을 호랑이'라는 뜻의 '秋老虎(쵸라오후)'라고 한다. 그만큼 무섭게 더운 날씨를 우리는 지금 보내고 있다. 남은 더위에 건강하시길요.
덥다 덥다 하니까 더 더운 것 같아서, 너무 시원해서 추웠던 그때 기억을 불러내본다.
입춘(立春)은 좀 다르다. 입춘은 부록으로 꽃샘추위가 함께 따라오기는 하지만, 며칠 안 지나 우수(雨水) 즈음이 되면 대지에 봄비가 내려 겨우내 황량하게 얼었던 땅이 촉촉하게 젖으며 녹기 시작한다. 경칩(驚蟄)이 동물을 흔들어 깨우는 절기라면 우수는 땅과 식물을 노크하듯 똑똑 깨우는 절기다. 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어김없이 양손에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냉이 사냥에 나선다. 겨우내 줄기차게 식탁에 올라왔던 봄동도 이제 좀 물리고, 쿰쿰해진 김장 김치도 별로 성에 안 찬다.
봄이다. 향긋한 봄나물의 계절에 냉이를 선두로 달래와 쑥을 줄 세워본다. 이들의 타고난 체취는 맹맹한 코를 시원하게 해 주고, 맡을수록 두통이 가시는 마력이 있다.
엄동설한에 추위를 이기려고 따뜻한 땅 속 깊은 곳으로 뿌리를 뻗은 냉이는 그 깊이가 대단하다. 보슬보슬한 잔뿌리로 흙알갱이를 꼭 안고 억척스럽게 올 겨울도 잘 이겨냈다. 뿌리가 깊게 박힌 냉이는 언 땅이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힘주어 억지로 뽑으려다 자칫 뿌리가 끊어져버리거나 잎째 뜯어져버리가 쉽다. 심마니가 산삼을 캐는 마음으로 잔뿌리가 다치지 않게 호미로 흙을 살살 긁어내 밑동을 잡고 슬슬 흔들어 준다. 뿌리가 워낙 깊어 땅과 붙잡은 힘에 내 손이 무색하다. 손가락으로 흙을 달래 가며 들어내면 뽀얗고 향긋한 뿌리가 내 손바닥에 안긴다.흙내와 향내가 어우러져 그립던 봄내가 된다.
손 빠른 엄마와 게으르고 느린 손의 내가 캔 냉이는 금세 바구니 한 가득이 된다. 흙과 한 몸이나 다름없기에 일일이 펼쳐놓고 한바탕 다듬고 씻어야 한다. 흙이 숨어있는 곳을 칼로 다듬어 흐르는 물에 여러 번 헹궈내야 한다. 체온 유지를 해준 뿌리가 차가운 수돗물에 닿으면 냉이는 잎을 안으로 바싹 오그린다. 한겨울 노지에서 추위를 버틴 식물이 추위에 대처하는 방법을 나름 터득한 게 기특하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 애쓰고 터득해 왔을 지혜가 숭고하다.
집안 여자 둘이 앉아 신문지 위에 펼쳐놓고 냉이를 다듬는 이 시간은 내게 성적표다. 냉이라고 생각해서 캤는데 아닌 것이 절반이다. 향기도 비슷한데 엄마는 아니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을 대며 "ㅇㅇㅇ만 엄청 뜯어왔네" 하신다. 에잇, 반타작이다. 엄마의 내공을 어찌 따라갈꼬.
먹는 건 질 수 없다.
깨끗하게 씻은 냉이 한 바구니와 장에서 사 온 살아있는 주꾸미가 벌써부터 양푼에서 탈출 기회를 노리고 있다. 된장만 심심하게 풀어만든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먼저 탈출하는 싱싱한 놈을 제일 먼저 샤워시켜 준다. 맨 손으로 냉이를 듬뿍 집어 함께 투하한다. 살짝 끓으면 건져내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면 올봄 최고의 보양식이 따로 없다.
나의 소울 푸드냉이 주꾸미 샤부샤부다.
사진이 없어 애석할 뿐..
매년 봄이 되면 이게 제일 먹고 싶다. 뿌리째 먹어야만 느낄 수 있는 진한 향과 쫄깃한 주꾸미와의 조화는 무엇과도 대체할 수가 없어 타향살러에게는 슬픈 음식이기도 하다.
상하이의 채소시장에서 만난 냉이는 내가 아는 그 얼굴이 아니다. 뿌리도 얇고 잎도 보드랍다. 자고로 냉이는 거칠고 억세며 진한 향이 포인트인데 그 당연한 향기도 당연하지 않다. 이곳의 냉이는 아무래도 온실에서 비료 먹으며 바깥의 추운 날씨를 전혀 모르는 채로 자란 것 같다.
삶이 퍽퍽해 지푸라기 하나, 흙 알갱이 하나라도 붙잡아야 했을지라도 그 시간 묵묵히 참아내며 깊어진 뿌리에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향기와 영양이 있다. 여린 초록이 아닌 진보라와 청녹이 섞인 겹겹의 잎이 소박하고 강인하다. 굵고 잔털 많은 뿌리에 꺾이지 않는 우직한 생명력이 있다. 진하게 뽐내는 냉이의 향기가 잎에서, 뿌리에서 진동한다.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