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장을 앞둔 남편이 주말까지 붙여 일본에 있다 올 눈치다. 금요일에 퇴근하면 퍼뜩퍼뜩 돌아오던 사람이 후지산 밑으로 여행도 가고 사람도 만날 거라고 한다. 식당을 알아보고 기차를 검색하는 휴대폰 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이 적잖이 상기되었다. 동선에 큰 아웃렛이 있다던데 선물 사 올 거냐 묻지만 체류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한다. 체류 시간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대단한 걸 사 오려고 했나 보다. 우리 가시버시의 언어 궁합이 아직 제자리다.
출장 외 일정이라 숙소를 직접 예약해야 한다. 혼자 몸이라 가장 저렴한 순으로 정렬해서 보고 있는 눈이 소년처럼 빛났다. 자유다.
"지난번에 우리 그 숙소 어디지?"
4년 전 겨울, 이케부쿠로 역에서 내려 전봇대를 끼고 들어간 골목에서 좌로 우로 두세 번의 골목길을 더 만났다. 주소와 길 찾기 앱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 도착한 곳인데 남편은 여기가 맞냐고 자꾸 묻는다.
주택 건물들 사이에 자리한 깍두기 모양의 철제 컨테이너 박스.
예전에 짐을 잠시 보관할 곳이 필요하여 이삿짐 사장님이 연결해 준 컨테이너 보관 창고와 비슷했다. 해운 회사 이름이 쓰여 있는 컨테이너 선에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지는 회색 화물 컨테이너와 차이가 없었다. 사진 상에서는 깔끔한 캡슐 호텔 같은 느낌이었는데, 숙소는 페인트가 곳곳이 벗겨지고 녹이 나기 시작한 문고리로 우리를 맞았다. 집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목소리에 "하룻밤이잖아" 하며 달랬다. 잠겨있는 문고리 옆에는 키박스가 있었다. 미리 전달받은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얇고 조악한 투명 플라스틱 뚜껑이 째깍하며 열쇠를 뱉어냈다. 오랜만에 만져본 열쇠의 차갑고 우툴두툴한 촉감이 낯설었다. 열쇠를 꽂아 넣고 찡하게 차가운 손잡이를 돌리니 찰칵 쇠를 물고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눈앞의 네모진 공간에는 사늘하고 습한 공기가 묵직하게 앉아있었다. 현관이 없어 차마 문밖에 벗어놓지 못한 신발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컬러풀하게 꾸며진 방은 일본인들의 국민성처럼 실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이 좀 낮은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벽 옆으로 아슬아슬한 사다리가 위층으로 이어지는 복층 구조였다. 정확한 면적은 알 수 없으나 우리 세 식구가 양팔을 나란히를 하고 서있으면 누구 하나는 문밖으로 손이 나올 수도 있는 아담한 크기였다.
구석구석에서 일본인의 실용 추구미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한 명이 겨우 들어가는 화장실이었다. (남편은 문을 닫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안의 특이한 변기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플라스틱 변기 위 쪽의 물탱크 자리에는 세면 대야가 연결되어 있었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흘려보내는 물로 변기까지 청소가 가능한 디자인이었다. 세면기 옆으로 작게 연결된 샤워기는 이곳에서 샤워도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허리를 굽힐 수 없으니 머리는 서서 감는 조건으로만 가능했다.
1월의 일본은 뼈까지 추웠다. 보일러가 없던 숙소는 온풍이 나오는 벽걸이 에어컨이 한대 있었는데, 온풍은 성질이 가벼워 계속 위로 올라갔다.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층이 뚜렷하여 서있으면 몸은 춥지만 얼굴은 따뜻했다. 아래층 침대는 시베리아 겨울만큼 추웠고, 천장 바로 밑 복층 위 침대는 봄바람처럼 온화했다.
"나갔다 잠잘 때 들어오자"
취침만을 위한 공간으로 판단된 그 옹색한 공간은 우리를 급히 밖으로 내몰았다. 덕분에 현지인들의 가옥들 사잇길을 걸을 수 있었고, 동네 맛집에서 학원 끝난 아이들과 엄마들의 떠들썩한 식사자리를 엿볼 수 있었다. 일본어의 '일'도 못하는 내게 줄곧 일본어로만 설명하는 사장과 종업원의 인내심과 정성에 감동이 되기도 했다. 아슴아슴한 해질녘의 마트에는 전품목 세일 딱지가 붙어 있었다. 이 시간을 기다린 주부들이 장바구니를 맘껏 신나게 채우고 있었다. 땜빵 흔적이 없는 검은 아스팔트가 가로등에 깨끗하게 빛났고, 오가는 행인들은 한결같이 조용하고 우아했다.
흩날리는 눈발 위에 사람 냄새나는 고즈넉한 마을 풍경이 그림이 되어 남았다.
호텔 바캉스, 즉 호캉스가 유행을 타고 번지더니 어느덧 쏙 들어갔다. 호텔 카페에서 도도한 망고빙수를 먹고, 비키니 입은 몸매자랑은 풀사이드 무제한 바비큐와 맥주로 절정에 달한다. 노곤하고 얼큰해진 몸으로 희고 포근한 침구에 파묻혀 하루 휴가가 다한다. 평소에 못하는 걸 해보자는 심리를 반영한 호텔 마케팅에 천정부지로 높아지는 하룻밤 호텔비가 아르바이트생 한 달 월급이다. 5성급 호텔 위주로 즐기던 호캉스가 4성급에서도 특별화된 서비스로 대중에게 보편화되더니, 펜션과 풀빌라에서도 호캉스를 즐길 수 있는 서비스가 일반화되었다.
결과적으로 호텔은 좀 뻔해졌고, 여관은 본래 뻔한 곳이다. 숙소의 선택에 있어 예전 같은 설렘이 많이 희석되었다. 그래도 아직 다양한 설렘을 품게 하는 곳이 있으니, 에어비앤비가 그런 곳이다. 골목의 인적 드문, 혹은 인적이 많은 일상적이면서도 독특한 이국적 설렘이 아직 그곳에 있다. 후지산 밑의 노부부가 운영하는 일식 아침을 제공하는 다다미 숙소가 그렇고, 만날 법하지 않은 무작위의 사람들이 만나서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잠을 자는 공용 숙소가 그렇다.
지난 일본 여행에서 먹었던 스시도, 새로 사 입은 무지(MUJI) 파카도, 편의점의 명란 삼각김밥도 좋았지만 우리 가족에게 그날의 컨테이너 박스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거기 좋았지~" 하는 딸아이의 말에 나도 그곳이 조금 그립다. 좁은 틈으로 세차게 불어드는 메마르고 스산한 방에서 온풍기라는 봄바람에 의지해 껴안고 보낸 그날 밤이 선하다.
이번 남편의 일본 여행의 동선에 4년 전 컨테이너 박스는 없다. 대신 남성 도미토리를 시도한다. 어차피 술 먹고 들어와 잠만 잘 거라는 남편의 이유가 쿨했다. 옆 칸에 코골이 신사라는 철옹성만 만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분명 남다른 추억이 될 것이다. 이튿날 코골이 신사와 악수하고 형제 동맹을 맺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