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편지
느닷없는 부모님 방문에 어수선한 방이 분주하다. 전날밤 꿈에 아빠가 나오셨는데 찰떡같이 맞아떨어진 우연에 사뭇 놀라며 두 분의 반가운 얼굴을 맞았다. “나 이제 일 그만하련다.” 하시던 꿈속의 얼굴과 지금의 낯빛에 기시감이 찾아온다. 평일에 엄마와 먼거리를 오신 아빠를 보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출근은요?”
아빠는 정년을 5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하셨다. 그렇게 퇴직 후 첫나들이가 서울 딸네집이었다.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명퇴를 신청한 아빠의 독단적인 결정에 엄마는 마냥 섭섭한 눈치였다. 모든 결정을 누구와 상의하는 법이 없으시기에 나는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그리웠던 삼식이 생활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삼시 세끼에 지는 해가 아쉽다. 여전히 삐그덕 대고 찌그락대는 현실부부의 모습이 내 눈에 익숙하다. 그간의 헤일 수 없는 고생을 짐작하며 나는 앞으로 더 자주 뵐 수 있게 된 아빠가 반가웠다.
남는 게 시간뿐이라고 하셨다. 많아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아빠가 집에 계시니 자주 드나들던 남동생의 발걸음이 뜸하다. 그 어린 녀석은 어릴 적 아빠께 호되게 혼난 후로 그 기억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사는 못난 놈이다. 무뚝뚝한 부자(父子)를 보는 모녀(母女)의 마음이 편치 않다.
기회였다. 아버지학교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점심이나 드시고 오시라고 꼬여 일주일에 한 번, 4주 과정을 등떠밀어 등록해드렸다. 이왕에 새 인생을 살고자 결정한 이른 퇴직이 아니었나.
“나는 아버지입니다.”
강당에 크게 걸린 현수막과 배경을 장식하는 웅장한 음악. 입장하는 아버지들의 마음에 비장함이 서린다. 아버지들만 모인 자리에 모든 아버지들이 그간 눌러온 감정을 풀어놓고 실컷 운다. 막현던 눈물 샘이 둑이 터진 것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가장이라는 공통점으로 금세 가까워진 이들은 존재 자체로 서로에게 응원과 격려가 되었다. 남의 사연이 어쩜 그리 나의 일 같고, 나의 풀지 못한 응어리를 그들이 풀어주니 속이 편해진다.
3주 차 숙제로 아버지들은 가정에 불화가 있는 자식이나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임무를 받아왔다. 4주 차는 졸업식이었는데 아내와 함께 참석하여 그간의 소감과 앞으로의 다짐을 나누고, 특별히 아내를 위한 세족식을 진행했다. 가장의 무게에 짓눌린 아내의 삶이다. 그 여린 삶을 보듬고 다독이지 못한 날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이 그 시간 폭우 같은 눈물로 씻겨진다. 좋지만 간지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엄마와 마음이 후련하다는 아빠는 그 후로 한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아빠가 남동생에게 쓴 편지는 엄마라는 메신저를 통해 대상에게 전달되었다. 읽고 난 소감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아빠를 너무나 똑 닮은 동생의 억눌려 펴지 못하는 감정이 측은했다. 동생의 이삿짐 사이에서 삐져나와 바람에 흩날려 날아가던 그 진중한 편지. 그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전 일은 다 잊고 앞을 보며 살자던 아빠의 글자가 내민 손은 지금껏 맞잡아지지 못한 채 비어있다.
“아버지학교 그거 하나도 효과 없더라.”
배움보다 실천이 중요함을 모르시지 않다.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 상황을 그저 누구 탓으로라도 돌리고 싶으신 거다.
가족이라도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가족이라도 안 보고 싶을 수 있다. 가족이니까… 로 묶인 테두리 안에 할퀸 상흔이 가득하다. 개구리가 귀엽다고 손으로 잡으면 개구리는 화상을 입는다. 개구리에게 사람 손의 온도는 너무나 뜨겁기 때문. 사소한 터치가 상대에겐 화상이 될 수 있고 위협이 될 수 있다. 잘 되라고 한 말과 손짓에 픽 쓰러져 일어서지 못하는 약한 이에게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고심하며 한 자 한 자 적어내던 아버지의 글자들이 동생의 닫힌 마음 문 앞에서 부단히 노크를 하고 있다. 늦은 사죄일지라도 본인 마음의 짐을 덜어낸 것으로 족하실지 모른다. 못난 자식이 더 겪고 성숙해졌을 때 시간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서로의 거리가 영원한 거리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더디고도 빠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