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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18. 2024

부정(父情)

뜨겁고도 깊은

자고 있는 은유 침실에 슬그머니 들어간다. 밤새 잠꼬대와 이불킥의 흔적을 정리하고 이불을 다시 펴 침대 위 조그만 몸을 감싸듯 덮어준다. 행여 잠 깰까 조심히 옆에 앉아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등을 긁어주고, 귀를 만져 준다. 푹 꺼진 매트리스 진동으로 잠이 깬 은유는 "귀 쫌만 더" 하고 주문한다. "이 눔의 자식이 요구도 많네." 하는 크고 두꺼운 남편의 손이 작은 귀를 귀여운 듯 요리조리 비벼준다.


우리 아빠도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면서 아빠와 피부 접촉을 떠올려보면 부끄러울 만큼 생소하다.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떠올릴 기억이 빈약해서 가난하다. 나에게 아빠의 이미지란 엄마에게 학습된 것이었다. 표현력이 부족한 아빠를 대신해 엄마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했다. 너희 아빠는 자상해. 너희 아빠는 가정적이야. 너희 아빠는 표현은 안 해도 속정이 깊어. 공감되지 않지만 굳이 반박할 이유도 없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평생을 지냈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어쩌면 본인의 희망사항을 나열하고 계셨던 걸지도 모른다.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기 때문에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자주 산에 다녔다. 약수터에 가려면 건너야 했던 4차선 도로에는 신호등도 없는 무심한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땐 어김없이 아빠가 내 손을 잡고 길을 건너주셨는데, 아빠 손이 미지근하고 참 보드라웠다. 아마 나는 살짝 웃고 있던 것 같다. 굳은살 없고 곧은 손의 느낌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지만, 길을 건너자마자 아빠는 내 손을 던지듯 놓았다. 좋다고 생각한 촉감이 금세 머쓱해졌다.


고입 시험과 대입 시험을 거치며 가고 싶은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도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기뻐하는 다른 가족들 사이에서 아빠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티브이에만 빠져 계셨다.

아빠는 안 기뻐? 하고 묻는 내게,

그럼 못 갈 줄 알았니? 하고 답하는 아빠.

나를 갸우뚱하게 하는 아빠의 어록이 오해와 함께 날로 쌓여갔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결코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강요받아 온 한국 남자들. 남자는 쉽게 울어도 안되며 웃어도 안되었다. 표현의 제약을 안고 살아야 했던 그 당시 남성의 삶은 물기 없는 광야처럼 끝없이 황량했다. 열심히 돈 벌어 처자식 먹여 살려도 커서는 엄마만 인정받는 이 더러운 세상! 하며 마음속 섭섭함 또한 애꿎게 표현하지도 못한다. 자식들 자만할까 칭찬에 인색하고 회초리만 휘두르던 우리네 아버지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말에서 허(許)한 대로 아빠는 장례식에서 목놓아 할머니를 불렀다. 아빠는 인생에 단 한번 그렇게 울었다.


은유를 출산하고 6개월을 친정에서 보냈다. 밤낮 없는 육아에 심신이 지친 나는 느닷없이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하루에 딱 2시간,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고 나는 서재에 들어갔다. 나른한 오후 아기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 2시간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자는 아기를 품에 안고 살랑살랑 흔들어주는 친정 아빠의 뒤태가 새삼 자상해 보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오랫동안 안 들리니 이상했다. 살금살금 다가가 문틈으로 들여 본 안쪽에는  늙은 아빠가 손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빠의 애정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원망했던 결핍의 시간들이 그 순간 흔적없이 휘발했다.


젊은 할아버지는 이제 늙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친정집에 머물러 있다가 상해로 돌아오는 날이 가까워지면 부모님 눈을 마주치기 어렵다. 보고 배운 게 그거라 자연히 나도 표현이 서투른 딸로 컸다. 무심하게 있다가 무심하게 떠나는 것이 우리 가족 스타일인데,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보이는 뒷모습에 아쉬움과 섭섭함이 드러날까 씩씩하게 백팩을 둘러멘다.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시는 젓가락 같은 두 분을 보며 튀어나올 것 같은 눈물을 꼭꼭 단속한다. 안아주시려는 타이밍을 살피시는 아빠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어깨만 부딪히고 마는 어색한 포옹에서 그 뜨겁고도 깊은 부정이 나를 오래 감쌌다.




(에필로그)


"엄마 왜 울어?"

"은유 넌 좋겠다. 엄마 아빠랑 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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