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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25. 2024

나는 그냥 나

"별일 없지?"

"건강 관리 잘하고!"

"몸은 좀 괜찮아?"

"잘 먹네."


난 원래 잘 먹고, 별일 없이 잘 지내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어요. 내가 왜 유방암 환자가 되었는지.

이유가 될 만한 곳을 수소문하고, 또 따져물었고요. 유방암 잘 걸리는 사람 유형 리스트에 난 없었어요. 난 뚱뚱하지도, 육식을 사랑하지도, 운동을 싫어하지도, 단것도 기름진 것도 좋아하지 않거든요. 대체 알 수가 없었지요. 지금은 그것을 그냥 애매한 스트레스 탓으로 떠맡겨요. 해결되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응어리진 채 놔두었던 시간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모를 코로나 주사까지요. 누구도 이유를 알 수 없겠지만요.

그래서 지금은 그냥 받아들여버렸어요. 잠자코 어깨나 한번 으쓱하는 수밖에요.


민망한 항암 머리와 독한 항암 주사에 억울했어요. '왜 하필 내가?' 하고 묻다가 '나도 그럴 수 있지' 하며 설득했어요. 아직도 나를 암환자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실은 이제는 암환자가 아니고 암생존자예요. 암경험자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런데 암생존자/암경험자 이전에 나는 나예요. 사실 지금 이 모습이 나지만 누가 나를 너무 환자 대하듯 하는 것은 반갑지 않아요. 지금은 머리도 났고, 피부색도 좀 밝아졌고, 종양지표도 정상인데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환자로 보는 게 싫어요. 그렇다고 너무 무심하게 대하면 또 서운해져요. 제 삶이 그렇게 모순의 연속입니다.


공원을 달리다가 벙거지를 눌러쓴 창백한 여인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어요. 한눈으로 보아도 항암 치료 중인 분이에요. 그 당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려 보며 말을 걸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어떤 식으로든 용기가 되어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생각만 하다 지나쳐 버렸어요. 돌아보니, 그분은 질병으로 당신을 정의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릴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늙어도 마음은 청춘인 것처럼, 환자도 마음은 팔팔하거든요. 외면의 모습이 그분의 내면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섣부른 제 착각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해요.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며 지나쳐 온 그분의 밋밋한 뒷모습에 그 당시 제 모습이 겹쳐 보였어요.


외면이 내면과 같고, 내면이 외면과 같을 거라는 제 생각의 뿌리를 고쳐 잡아가는 중이에요. 어디까지나 외면은 외면일 뿐이고, 내면은 내면일 뿐이에요. 그것을 잘 분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건강한 사람이란 생각도 들고요.


우리가 앓는 병이 곧 우리 자신은 아니므로, 병명으로 정의되거나 속박당해서는 안 된다.  

<늙는다는 착각, 엘렌 랭어>


아이 학교 친구 CC가 저희 집에 와서 하룻밤을 묵었어요. 재밌어 죽겠다는 그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생각이나 표정을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 엄마 미소로 바라만 보았지요.

엄마들 사이에서 10세 즈음의 딸을 데리고 소아과에 가서 뼈연령을 알아보는 검진이 한 때 유행했어요. 병원에 가서 손 엑스레이를 찍어 뼈 연령과 성장 속도를 파악하는 진료예요.

CC는 키가 매우 작아요. 우리 딸과 서 있으면 머리가 딸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그 아이는 성장 호르몬 주사도 맞는대요.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아이의 키가 아니라, 말로 드러나는 마음 상태였어요. CC는 자신의 외면과 내면을 분리하여 생각할 줄 아는 아이였어요. 자신의 키가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말하고 웃었거든요. 그 순간 그 아이 눈빛 저편에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 호수가 반짝였어요. 제게는 요동치던 마음 파도가 순식간에 잠잠해진 순간이 되었고요.   


"야야, 내가 지난번에 화장실에 있는데 친구들이 와서 나를 부르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양변기에 앉으면 땅에 발이 안 닿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아무리 화장실 문 아래 틈으로 나를 찾아도 나를 찾을 수가 없는 거지! 거기 있었으면서도 없는 취급을 받은 그 상황이 너무 웃기지 않냐?"


남의 이야기하듯 즐거워하는 얼굴로 셀프디스하는 아이를 처음 봤어요.  


"야야, 그리고 나는 내 동생하고 발 사이즈가 똑같아. 한 번은 내 동생이 내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다니깐!

봐봐. 진짜 작지?"


집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딸이 작아져 못 입는 옷을 건넸어요. CC는 자신을 잘 다루는 아이여서, 작아진 귀여운 옷을 입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정말 귀엽다고 말하는 것을 꼬아서 듣지 않았어요. 그 아이의 생각과 마음의 건강함이 진심으로 부러웠답니다.


누군가의 말이 내 가슴을 찌를 때, 그 사람이 아는 나의 모습과 본래의 나의 내면을 분리해보려고 해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나를 찌르고 있는 건 아닌지도 구분해 보고요. 과거의 모습이 불변의 나인 것처럼 생각하여 달라진 지금의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해요. 지금의 외양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피부과에 가서 쉽게 주름살 펴지 말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외면일 뿐이에요. 팽팽한 내면도 '나'라는 것을 기억해요.


"별일 없지?"

"건강 관리 잘하고!"

"몸은 좀 괜찮아?"

"잘 먹네."


사실 이 안부는 아프기 전에도 늘 받던 인사네요. 문제는 제 삐딱함에 있었군요.

뭐라 칭하던, 뭐라 묻던 '나는 그냥 나'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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