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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26. 2024

선물 같은 시간

새벽 클라쓰

"엄마, 난 왜 그림을 못 그릴까?"

다이어리 꾸미기.

또래애들과 스티커를 붙이고 그림도 그리며 알록달록 동심 넘치게 꾸미는 재밌는 놀이에도 아이는 색색으로 줄만 긋고 있다. 포스터 그리기 과제를 할 때도 그림 그리는 친구 옆에 글씨만 묵묵히 쓰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나도 그림에 젬병이었으니 그 마음과 바람이 이해가 된다.

미술 시간에 한 터치 한 터치 더할 때마다 떨어지는 성적.

미술 C학점으로 반친구들 성적을 깔아주는 역할을 맡던 나로서는 딸의 볼멘소리에 적절히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림 그리기 책도 사주고 미술 학원도 보내보고 물개 박수와 칭찬도 쏟아붓지만, 그림 속의 의구한 강산만큼 아이의 성취감이나 만족감도 예전 그대로, 의구했다.  


큐리어스에서 온라인 수업을 둘러보다가 '스케치노트'라는 수업을 발견했다. 건강 상식과 연계한 수업 콘셉트는 둘째치고 '스케치'라는 단어에 자석처럼 이끌려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이거 같이 할까?

새벽 6시에 열리는 수업인데 중국 시간으론 5시라서 나도 아이도 도전의식과 결심이 필요했다. 어젯밤 내 폰에 한번, 아이 폰에 한번 알람을 세팅하고 우리는 약속한 대로 새벽 4시 45분에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날은 어두워 은은한 간접등 하나를 켜고 잔잔한 음악을 흘려 놓았다. 얼굴에 한번, 목구멍에 한번 물을 축이고 책상에 앉은 우리 모녀의 모습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책상 서랍에 있는지도 몰랐던 색색깔의 색연필을 다 끌어 모아 꺼내 놓았다. 준비물을 질서 없이 책상에 뿌려놓고 연습장 한 페이지를 하얗게 펴고 앉은 아이의 옆모습으로 비치는 비장함에 방금 기사 작위를 받고 세상의 부정을 바로 잡으려 집을 떠나는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어설프지만 그 칼날 같은 의지와 각오를 다진 기사의 희망 가득한 눈빛이 방금 잠에서 깬 어린 눈에서 반짝였다.


강사님은 대학병원에서 오래 근무하신 간호사 선생님이었는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의료 상식에 작고 귀여운 삽화를 추가하여 그리며 메모하는, 이른바 다이어리 꾸미기의 고수라고 불려 마땅하실 분이었다.

내가 오늘 잘 찾아왔구나!


오늘의 주제는 <고혈압 관리>.

고혈압은 현대인의 만성질환으로 간주되는 만큼,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미경으로 관찰한 정상 혈관과 노폐물이 축적된 혈관의 비교를 통해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질병과 증상을 이해하고, 혈관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병원에는 로비에 대기하는 환자들의 편의를 위해 혈압계가 비치되어 있다. 나도 들를 때마다 습관적으로 확인을 하는데, 희한하게 병원만 오면 긴장이 되니 혈압계에 손을 넣는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 한다. 이 상태로 수치가 잘 측정이 될까 하는 의심하는 사이, 은행 번호표 같은 작은 기록지가 기계에서 출력된다. 정상혈압(120/80mmHg)과 고혈압(140/90mmHg)이라는 수치 비교표를 보며 내 위치를 확인하지만, 이거 떨려서 수치가 애매하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백의혈압'이라고 일컫는데, 백의(白衣)를 입을 의료인을 보면 들게 되는 긴장 심리를 반영한 혈압이라는 뜻이다. 이번 수치는 백의혈압이라 언제쯤 제대로 된 혈압을 잴 수 있을지... 집에서 혈압계를 사용하면 정확한 측정이 가능할까.


친정 아빠 혈압이 고공행진이다. 나이가 들수록 혈관벽에 쌓이는 노폐물 증가로 혈압이 상승하는 것은 다행히(?)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정상혈압으로 돌리기 위해 운동하시고 식이 조절하시는 아빠에게는 어쩌면 걱정을 덜어드리는 반가운 지식(?)이 될 수도 있겠다. 고혈압은 유전, 가족력을 제외하고 운동, 스트레스, 염분 섭취, 과음, 흡연, 비만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식이조절이 필수(채소, 생선 위주), 염분 섭취 1일 5g 미만, 그리고 매일 3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으로 관리할 수 있다. 상태에 따라 약물요법이 사용될 수 있으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임의로 약을 끊는 것보다 용량을 조절하는 식으로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수업 중 쏟아지는 의학 상식에 "이게 모야! 그림 배운다며!" 하던 아이는 어느새 색연필을 바꿔가며 노트 필기와 삽화에 집중하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여한 아이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족한 잠을 보충하러 다시 침대에 돌아갔지만, 계속 바스락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잠이 다 깬 모양이다. 등과 엉덩이를 토닥여 주러 간 아이 방에 이불을 둘러 쓴 애벌레가 계속 꿈틀대고 있었다.


"추워~" 하는 어리광에 이불을 겹으로 덮어준다.

"오늘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새벽 1시간으로 우리 은유가 우리나라 11살 어린이 중에서 고혈압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어린이가 되었을거야!"


새벽 시간을 활용하여 하루를 배움으로 시작하는 경험이 오늘 내게도 아이에게도 귀한 의미가 되었다. 요즘 게을러져 새벽에 잘 일어나지도 않으면서 쓰는 '새벽소리' 필명에 미안할 지경이었다. 새벽이 주는 평온, 배움, 각오, 안정, 고요라는 선물을 성탄절 선물처럼 품에 한가득 받았다.

우리의 하루가 좋은 시작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찰 것이라는 생각에 바위 같던 게으름이 티끌처럼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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