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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27. 2024

비싸면 좋다.

가격 플라세보

일부러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남편은 아예 들어오지도 않다가 나의 부름에 못 이기는 척 발을 들여놓았다. 괜한 한마디에 무식함이 탄로 날까, 바가지로 이어질까, 우린 무의식적으로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엉뚱한 한마디가 주인장에게는 백지수표를 내미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입장부터 지독한 심리 게임이다. 


벽을 따라 수도 없이 걸려있는 미완의 작품들, 질서 없이 바닥에 쌓여 있는 세계 각지 출신의 크기도 다양한 브라운색 몸뚱이들, 먼지 쌓인 백열등 스탠드, 손때 묻은 작업대 상판이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공장과 가장 반대편에 있었다. 



주인장이 내미는 그것은 나무 절단면의 사포질이 아직은 익지 않아 날 것의 형색이 남아있는 중국산 재질의 것이었다. 직접 들어보고 켜서 음색을 확인하지만 내 귀는 무슨 일인지 좀 전의 '중국산 재질'이라는 말에 갇혀있다. 때문에 듣는 귀는 충분히 깨어나지 않고 거즈 같은 편견이 입혀져 음색은 흐릿했다.  


다른 제품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딸아이의 요청에 주인장은 유럽산 재질의 것을 건넨다. 세월의 흔적을 꾸며내 악기 바디에 알 수 없는 스크래치 문양이 추가되어 있다. 좀 전의 그것보다는 진한 컬러로 묵직해 보이며  단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악기를 손에 들기도 전에 가격부터 묻는 딸아이의 입방정을 단속했다. 이미 유럽산이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소리의 공명이 좀 전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 작고 보드라운 몸체에서 나온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울림이 있는 멋진 소리였다. 적어도 내 귀가 그렇게 말했다고 믿었다. 


정가(定價)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을 그곳에서 주인장 입을 통해 나오는 가격은 백화점 가격표처럼 도도했다. 할인도 협상도 안 되는 구두(口頭) 정찰제. 유럽산 재질이 중국산 재질의 것보다 가격은 정확히 두 배가 높았다. 엿장수 말은 곧 법이 되었다. 남편은 별반 차이 없다고 중국산을 종용했지만 아이는 그 순수한 눈에 색안경이 제대로 씌워져 무조건 유럽산이란다. 


눈은 우리의 오감 중 시각을 담당하는 절대 가볍지 않은 역할을 한다. 덕분에 우리는 책도 보고 글도 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시각은 다른 감각과의 대열에 앞장서 목소리를 키우기도 한다.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요리사의 맛감정처럼 눈을 가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을 뜨고 본 이상, 세상 모든 것은 그 프레임 안에 자연스레 갇혀버린다. 

고급스러운 시각 효과에 더해 예산을 넘는 비싼 가격은 오히려 선택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가격과 품질이 정비례한다면 합리적인 선택이 되겠지만 사실 고가의 가격 자체가 주는 기대감이 품질이 좋다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판단할 때 자신의 직관에 기대 결론을 얻으려는 성질이 있다. 이처럼 단순하게 판단하려는 것이 휴리스틱 이론이다.

<무조건 팔리는 심리 마케팅 기술 100, 사카이 도시오>


사람이든 물건이든 기대가 생기면 색안경이 끼워진다. 진짜 좋은 유럽산 제품을 합리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는 주인장의 말에 ‘합리적’ 모습이 눈에 더 잘 띈다. 최초의 정보와 일치되는 모습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도 그렇다. 중국산 재질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이올린은 켜보기도 전에 왠지 다른 것을 좀 더 보고 싶다. 마찬가지로 비싼 제품에는 비싼 값을 할 거라는 기대치가 생겨 제품의 장점에 더 집중하게 된다. 단점을 발견하면 내 선택이 옳지 못했다는 걸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편함이 생기게 되는 것도 이유다. 한편 저렴한 제품은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생겨도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며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기 쉽다."그때 그 유럽산을 샀어야 했어. 그 공명이 죽였는데."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내게도 아이에게도 스쳐갔다. 한 번에 해결할 구매를 시간을 두고 두 번의 구매로 만들지는 않을까의 답정너 질문에 유럽산이 대답한다. 나야 나!


그렇다면 우리가 큰맘 먹고 구매한 고급 제품은 정말 좋아서 비싼 걸까 아니면 비싸기 때문에 좋다고 느끼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블라인드 테스트라도 진행할 수 있다면 모를까. 가격에 의한 기대 심리는 무의식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불충분한 시간이나 정보로 인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거나, 체계적이면서 합리적인 판단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간편하게 추론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격과 품질을 직결해서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의외로 가격에 따른 막연한 기대가 선택에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만족할 수 있는 구매도 꽤 많을 텐데 말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역사가 깊기로 정평이 나있기에 그 정평에 그만한 가치가 합당한 지 궁금했다. 어느 기관에서 전통적인 믿음을 깨는 놀라운 도전이 있었다. 그들이 진행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나는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치우쳐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했다. 세계적인 음악가 다수가 선택한 것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고고한 명기에게 작용한 것은 다름 아닌 가격과 역사적 가치였다. 


유럽산 재질로 중국에서 제조한 바이올린 한 대가 가까스로 우리 집 구성원이 되었다. 전공자에게는 아닐지라도 대학 동아리 생활까지는 괜찮겠다 싶어 부모 숙제는 다 한 것 같다. 한 푼의 할인도 없어 입이 나온 남편의 등 뒤에서 기쁨에 들뜬 딸아이의 의욕이 평생을 이어지기를 바란다.  니스 칠한 반짝반짝한 초심은 평생 가지되, 칠이 벗져지고 시간의 흔적과 노력으로 마모와 손때라는 새로운 옷을 입혀가기를 고대한다. 더불어 너의 손으로 연주될 무수의 곡들이 많은 이의 귀에 넘쳐 미소와 박수로 번져나길 바라본다. 이로써 가격은 소임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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