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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24. 2024

중국 어린이에겐 없는 것

상대에 대한 존대가 나에 대한 위축이 되지 않길

조선족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연음은 차치하더라도 각 글자를 제대로 읽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업이었던 만큼 나는 아이들의 발음에 집중했다. 부모 중 조선족이 한 명 이상이어야 등록이 되는 수업이었기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가정에서 부모가 일상으로 녹여내 자연스럽게 연습을 시킨다면 그것으로도 훌륭한 복습이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조선족 이탈 현상이 증가하면서 우리말을 쓰는 조선족의 수가 날로 줄고 있는 추세다. 조선족 여성들이 중국 대륙으로, 혹은 한국으로의 이주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자치구 내에는 총각 조선족이 늘고 있으니 우리말을 후대에 전할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말 보존 차원에서 부모와 교사가 한마음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한국 재외동포청의 교재를 사용했지만 '한국어' 대신 '우리말'이라고 칭하며 조선족에 맞춘 좀 더 포괄적인 교육 태도가 필요했다.


아이들의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은 가정에서 사용이 빈번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학기, 두 학기를 지나는데도 읽는 것이 제자리인 학생이 있었다. 치열한 학과 공부와 숙제를 뒤로하고 부모에게 등 떠밀려 온 아이들의 의욕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꾸준히 몇 년을 등록했다. 억지 춘향이처럼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나도 지쳤을 즈음, 아이 어머니를 우연히 마주쳤다.

"어머니, 혹시 가정에서 우리말 사용하시나요? 아이에겐 중국어가 편해서 그런지 우리말로 생각하는 것이 아직 익숙지 않은 것 같아요."

"선생님, 제가 직장에 다니다 보니 아이랑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아이가 우리말을 깨우치는 것보다 우리말의 존댓말을 듣고 익히면서 예절 교육을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반말과 존댓말을 나눠 배우는 언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 말 자체를 다르게 쓰니 외국인에게는 참으로 고역인 우리의 존댓말이다. 그러나 웃어른에 대한 예절이 우리 몸속에 언어와 함께 자연스럽게 습득되어, 그것이 생각이 되고 문화로 자리 잡은 역사가 길다. 언어의 힘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중국어를 들여다보자. 물론 중국어에도 완곡한 표현이 있고, 상대방을 '님(您)'이라 칭하는 표현이 있다. 허나, 말 자체가 달라 경어를 따로 배워야 할 경우는 일상생활에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이들을 예의 없다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다. 말은 소통의 일부이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어린이들에게는 한국 어린이들에게 없는 무엇이 있다. 무엇이 그들의 목소리의 볼륨을 크게 하는지, 무엇이 그들의 태도를 당당하게 하는지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중국 아이들에겐 '높고 낮음'이 없다. 이건 예의가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 어떤 다른 차원에서의 인간적 평등함을 기반으로 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 생각의 기저에는 모든 사람에 대한 대등 의식이 깔려있다. 동방예의지국의 아이들이 폐가 될까 쉽게 묻지 못하는 것들을 이들은 거침없이 묻는다. 이것은 소비자와 판매자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들 관계에서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앞설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경제 체계 안의 동등한 일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중국 아이: 사장님, 아까 제가 사 간 월드콘이 좀 눅눅했어요. 저는 월드콘 끝부분에 있는 초콜릿의 바삭함을 좋아하는데 아까 그건 좀 녹았더라고요. 바삭함은 전혀없었구요. 혹시 냉장고가 약한 거 아니에요?

가게 점원: 아, 그래요? 문이 조금 열려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문을 잘 닫아 놓았는지 확인할게요.


어린아이의 대화에 일말의 주저함이나 미안함따위는 없다. 그저 당당한 거래와 컴플레인만 있을 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언어습관이 중요함은 여러 번 강조해도 충분하지 없다. 하지만 이들의 학습된 배려나 예의 속에 불필요한 위축감이나 양보가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요즘 아이들은 당당한데 무슨 소리냐 하실 분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내 의견이 라떼의 내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 시절 어린이는 어른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고, 맞서면 혼나는 교육을 받아 온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나의 언어가 그것을 대물림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말대꾸야!"

중국 어른은 중국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정당한 생각과 의견을 펼치기에 상대가 어른이라서 위축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행위나 언사도 존중받을 수 있다. 상대가 어른이기에 존대하고, 어린이기에 반어를 쓰는 개념이 곡해 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나이를 불문하고 쌍방이 존대를 쓰는 모습이 제일 이상적이라는 첨언과 함께.

어린이도 "왜 저에게 눈을 부라리며 반대하시는 거예요?"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당당하게 어른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존중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믿는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린이 안에서 어른을 발견하고, 내 안에서 미숙한 존재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지나가던 중국 아이가 내게 아는 척을 한다. 호칭은 아줌마도 이모도 아니다.

"은유 엄마!"

당당하고 순수한 얼굴이 날 올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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