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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지원 Sep 03. 2021

단체장의 품격

 방송국에서 일한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연예인을 자주 보느냐'는 것. 서울 본사에서 한 달 동안 교육을 받을 때 연예인을 마주친 횟수와 2년 동안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본 연예인 수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큰 행사나 특집 음악회가 아니면 지역에선 유명 연예인을 보기 어렵다.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연예인보다는 정치인, 시장, 군수, 도지사 같은 단체장을 마주칠 일이 몇 배로 많다.   

  

 아킬레스건을 건드는 질문을 던져도 유연한 뱀처럼 스리슬쩍 잘 지나가는 베테랑 정치인도 여럿, 아랫사람이 써준 대로 줄줄 읽어가다가 꼬리 질문을 하면 턱 막히고서는 다시는 여기랑 인터뷰 안 한다고 ‘썽내는’ 단체장도 여럿이었다. 이제는 인터뷰이가 정해지면 인터뷰가 어떻게 흘러갈지,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불편한 관행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공무원 사회의 오래된 관행 중 하나가 진행자의 프로필을 요구하는 것이다. 해당 단체장이 직접 요구했는지, 아니면 아랫사람들의 의전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진행자의 출신학교와 나이, 프로필 사진, 입사 연도를 적어서 보내달라고 제작진에게 요구하는 걸 보고 기겁을 했다. ‘왜?’라는 질문에 진행자의 나이와 학력, 입사 연도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고 답 한다면, 인터뷰에 응하는 태도를 바꾸겠다고 한다면 흔쾌히 넘겨줬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제작진이  ‘시청자와 청취자를 대변하는 진행자인데, 개인 프로필이 왜 중요하냐’며 ‘정 궁금하면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라’고 전달하면서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해가 바뀌면 연례행사처럼 단체장을 모시고(?) 한 해 도정, 시정 계획에 대해 묻는다. 일종의 관례처럼 늘 해왔다. 단체장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더 자주, 더 친절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고, 그런 의미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게 나쁠 것도 없지만 기분 좋은 기억만 남지는 않았다.


 얼마 전 약속된 질문에 추가 질문을 했다고 아랫사람을 크게 꾸짖었다는 단체장 얘기를 전해 들었다. 각 부서에서 공을 들여 답변을 준비했는데 진행자가 ‘우리 00님 말씀을 끊었다’며 실무진이 제작진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단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방송이고, 일반 사람의 한 마디와 단체장의 한 마디는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부담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몰아세운 건 아닌가, 반성도 했다. 하지만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개인사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준비하고 있는 정책에 향후 효과와 계획을 묻는 질문에 답변을 못 내놓을 단체장이라면 정말 수준 미달 아닌가?


 준비되지 않은 질문은 일절 하지 못한다면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내가 아니어도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랫사람이 써주는 대로 읽는다면 단체장 역시 굳이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이 아닐까.      


 2017년, 청와대에서 예정되지 않은 취재진의 질문에 자유롭게 답하는 <시나리오 없는 기자회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졌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의 일이다.  


 다행히 얼마 전 그 인터뷰는 (내부에서의 판단이지만) 매끄러웠다는 평가가 나왔다. 뒤에서 아랫사람을 문책했을지는 몰라도 나름 당황한 기색 없이 나름 잘 넘어갔고, 청취자의 실시간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도 했다. 바라건대, 그가 화를 낸 이유가 ‘감히 나에게?’ 같은 권위의식은 아니었기를. 또 하나, 앞으로 진행자의 프로필을 갖다 바치는 관행은 사라지기를. 학력과 경력, 나이, 약속된 질문지를 떠나 단체장의 소신을 자유롭게 듣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장이 바로 방송국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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