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리뷰
'인간이란 무엇인가.' 심오한 철학서를 읽으며, 흐드러진 야경 속 손톱만한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반복되는 일상에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에서, 여타 스스로를 잔인할 정도로 객관화하게 된 순간에 누구나 던져본 적 있는 거대한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곧 돈벌이에 하등 도움이 안 될 답 없는 질문임을 깨닫고 훌훌 털어버렸을 지도. 우리는 인간이지만 인간을 모른다. 그 '개념'은 '개념'이라는 그릇에는 가둘 수 없는 버거운 부피를 지녔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이란 흔치 않은 우연이며 오히려 '죽어 있음'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다는 게 복잡한 삶의 조건들에 괴로울 땐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머리로 아는 것이 가슴까지 닿는 길은 너무도 멀고 아득하다. 우리는 여전히 떠나는 사람에 슬퍼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애도한다.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말이다.
창작집단 LAS에서 선보인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답 없는 질문을 이어가도록 하는 가장 예술적인 설득 방식이라 느꼈다. 이 고민에 대한 갈구가 결국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세상을 더욱 살만한 곳으로 만들 것이라는 확신을 안겨주는 공연이다. 많은 미래들이 뿌옇게 흐려지고 사랑하는 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것조차 어려운 지금, 정체되었던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름칠을 하고 싶다면 현재 두산 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 중인 <산책하는 침략자> 관람을 추천한다.
최근 다양한 서사 장르들을 향유하다 느낀 바가 있다. 아주 새로운 세계관의 구축보다는 현재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세계를 창조적으로 재현해 익숙한 듯 조금은 이질적으로 다루는 것이 주류인 듯 하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타인의 시선에 담겼을 때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대한 본질적 탐구심이 작동한 듯 하다.
특히 SF 분야의 창작물들을 통해 이를 실감할 수 있는데, 지극히 우주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소재를 현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젊은 독자층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정세랑 작가의 소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 가능하다. 이러한 시류에서 <산책하는 침략자>를 연극화한 창작집단 LAS의 선택이 시의적절하다 느낀다.
본격 SF 멜로드라마 플레이!
연극과 영화, 소설을 넘나드는 아름답고 강렬한 이야기 <산책하는 침략자>
동시대성을 가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집단 LAS와 함께 다시 돌아온다!
어느 평범한 마을에 외계인들은 지구정복을 위한 사전 답사를 온다. 이들은 인간의 몸에 영혼처럼 침투하여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념’을 수집한다. 그리고 한 번 빼앗긴 개념은 더 이상 그 사람들에게 남아있지 않다. 소중한 개념을 상실해 괴로워하는 개인이 있는 반면, 그동안 삶을 짓누르던 개념으로부터 해방되는 사람도 있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동일한 제목의 원작 소설이 앞선다. 후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영화화하는 등 큰 인기를 끈 서사이기도 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신지는 마을 축제 날 이후 3일 동안 실종되었다 돌아온다. 그러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아내 나루미를 끊임없이 당황시키는데,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을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의 개념,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 '나'와 '너'를 구분하는 방식 등이 그 예이다. 병원에서도 명확한 병명을 밝혀내지 못하자 주변인들을 날이 갈 수록 한숨이 늘 뿐이다.
일도 할 수 없게 된 그의 유일한 일과는 산책을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얼 하냐는 아내 나루미의 질문에 산책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배운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루미는 그것이 사실은 '빼앗는' 행위라는 것을 모른 채였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외계인'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마을에 일어난 변화는 고요한 호수 위의 파문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이 연극은 신지로 대표되는 외계인들의 개념 수집 과정과 이들에게 맞서려는 인간들, 또 외계인이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갈등이 주를 이룬다.
이 연극의 배경적 요소가 상당히 흥미로운데, 두 가지의 전쟁 상황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전쟁의 본질은 약탈자와 약탈 당하는 자가 있다는 데에 있다. 필자는 연극에서 등장하는 두 전쟁 상황을 '물질 전쟁'과 '비물질 전쟁'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배경이 되는 해안가의 작은 항구 마을은 현재 전시 상황이다. 이는 물질 전쟁에 해당한다. 적군의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전투기 소음이 새 소리만큼이나 일상적이며 뉴스에서는 불안한 소식들이 끊이질 않는다. 누군가는 불안함을 표출하고, 누군가는 이 전쟁이 모든 것을 제로(0) 상태로 만들 것이라는 점에 흥분한다.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을 사람들이 마주한 물질 전쟁의 실태이다. 이 전쟁은 그들의 신체, 건물, 실물 자산, 영토 등의 물질적 요소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한다. 이에 무기라는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요소로 대항한다.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쟁이라는 것도 짚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은 피상적이기만 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서사의 층을 이룬 또 다른 전쟁은 외계인과의 갈등으로 표출되는 '비물질 전쟁'이다. 여기서 외계인은 인간들의 개념을 빼앗는 약탈자로, 인간들은 빼앗기는 약탈 당하는 자로 등장한다. 앞의 물질 전쟁과 다르게 이 전쟁 앞에서 인간은 서로를 척져서는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각 인물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인간을 설득하고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는 등 다양한 적응 방식을 보여준다. '인간다움'을 뺏기고 있는 상태에서 공통의 인간성을 연대의 계기로 삼아 외계인에 맞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시 '우주적 관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인간'임을 언명하고 증명받은 후에야 삶의 지속이 가능하다.
비물질 전쟁과 물질 전쟁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인간다움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전시 상황 그 자체이다.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SF적 설정으로 은유했지만, 약탈자와 약탈 당하는 자 사이에서 그 위치가 불안정한 우리의 현주소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는 연극이라는 장르를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생생한 현장감 등을 이용해 이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외계인'을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으로 설정해 흑백 구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단순한 구도였다면 연극은 조금 더 심심한 결과로 나타났을 것이다.
개념을 빼앗긴 인간들은 크게 두 구도로 묘사되는데, '가족' 등의 소중한 개념을 잃어버린 탓에 일상생활이 불가해진 쪽이 있다. 이 경우에는 약탈자인 외계인은 완벽한 가해자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유'의 개념을 빼앗긴 덕에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날 묶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 자도 등장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소유의 개념이 전무하다면 세속 세계에서 살아가기 어렵겠지만, 이를 차치하고 그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극한의 자유로움을 얻는다. 오히려 외계인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개념들이 모여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음은 명징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솎아낼 필요가 있는 개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개념을 빼앗는 약탈자들의 존재는 오히려 필자에게 '개념 분리수거'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개념이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이지 반대로 정신이 개념을 구성하는 형태로 상황이 역전된다면 개념 과다 상태의 우리는 오히려 인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기본적인 개념들은 원만한 인간관계와 일상의 향유를 보장하고 그를 통해 느끼는 행복감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마루오라는 인물을 통해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 역시 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원초적인 인간성을 되찾게 해준다는 점이 상당히 의미 있다 느꼈다.
창작집단 LAS의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동시에 유머 코드도 놓치지 않고 있다. 오락 목적에도 충실한 작품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을 환기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평소에 SF 장르의 팬인 필자로서는 <산책하는 침략자> 특유의 리듬감과 일상 속에 스며든 SF요소에 큰 매력을 느꼈다. SF 특유의 거대한 세계관과 난해한 과학기술적 지식이 부담스러웠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덧붙여 원작이나 영화를 재밌게 본이라면 연극판 <산책하는 침략자>의 매력을 흠뻑 느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념을 뺏어올 때 노란 조명이 인간으로부터 외계인에게 옮겨지는 재미난 연출, 단순한 세트 위에서도 수많은 공간을 재현해내 몰입도를 높이는 점, 점차 인간다운 말투와 화법을 구사하는 신지 역할 배우의 세심한 연기 등을 놓치지 말길 바란다.
원문은 아트인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