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 둘> 리뷰
'난 너만 있으면 돼.'
이 얼마나 대책없이 낭만적인 말인가. '우리 둘'만으로 세상은 충만해지고,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일이 매일 조금씩 기꺼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낭만을 부리기에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날씨는 자주 변덕을 부리며 사람들은 서로의 둥지에 몸 담궜다 떠나가는 철새의 삶에 익숙하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종국에 날 울게 할 거라는 말처럼, 사랑은 항상 사랑의 감정만으로는 충분치 못해 온전치 못한 우리에게 온전함에 대한 꿈만 꾸게 한다.
'우리, 둘'은 완벽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응당 비집고 든 사랑이 그렇지 못하다. 둘 사이의 감정 전선에 문제가 없더라도, 자꾸만 누군가에 의해 재단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정말 둘의 세상에 둘만 존재한다면 모를 일이지만, 연인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각자의 삶 속에 깊이 뻗힌 다양한 관계망들은 서로를 보기 좋게 제외한 채 몸집을 불려간다. 그 속에서 '우리 둘'이라는 관계성을 지켜가는 것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떠 안은 과업이다.
영화 <우리, 둘>의 주인공 니나와 마도의 어깨가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중년을 지나 거의 노년에 다다른 두 여인은 로마에서 처음 만난 후 20년 동안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한 아파트에서 복도 하나를 두고 앞집 이웃처럼 살아가고 있으나 그들은 20년 동안 한결같이 서로의 체온으로 삶을 데우는 진짜 '연인'이다. 관광 가이드로 일했던 니나는 마도를 만난 이후로도 쭉 홀로 살았지만, 마도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다. 그러나 자녀들은 둘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들은 둘이 처음 만났던 로마에서 여생을 함께하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마도는 끝끝내 자식들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놓지 못하고 연인 니나에게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마도가 자신의 남편만을 평생 사랑했다 믿는 딸과 어머니에게 호의적이지 못한 아들 앞에서 마도는 강한 부채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마도를 옭아매는 족쇄가 니나와의 관계에까지도 천천히 감겨왔던 것이다. 본격적인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둘>의 색다름은 장르적 특징으로부터 시작된다. 여타 퀴어 서사와 다르게 '서스펜스 장르'로 정의될만 한 연출 방식이 빈번히 사용된다. 보통 퀴어 서사는 둘 사이의 로맨스에 강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퀴어로서 지닐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의 갈등을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 <우리, 둘>의 경우 후자로 인한 갈등의 증폭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서스펜스가 강조되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을 할 수 없게 된 마도의 곁에 어떻게든 함께 있으려는 니나의 거침없는 행동들은 서사적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특히 아파트 외시경을 통해 복도를 보여줌으로써 정보를 제한하는 연출 방식, 스릴러 영화에서나 사용될 법한 긴장감 넘치는 음악의 사용, 마도의 자식들이 둘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알게 될 상황에 대한 아슬아슬한 경계 등이 그러하다.
또한 오프닝 시퀀스로 등장하는 두 어린 소녀의 숨바꼭질 장면의 색감과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까마귀 떼, 그리고 이국적인 오브제들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 등 역시 사랑에 앞뒤없이 뛰어드는 니나의 정열과 대비되는 서늘함을 뿜어낸다.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퀴어 영화와의 조우에 관객으로서 무척이나 흥미로웠던 건 이 때문이다.
90분의 러닝 타임동안 영화는 서스펜스의 끈을 놓지 않고 '우리 둘'이라는 상태가 어째서 우리 둘만으로는 완전해지지 않는 지에 대해 보여준다. 사랑의 장르를 따지자면 로맨스보다는 서스펜스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영화가 끔찍하게도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오프닝 씬의 숨바꼭질 장면을 통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시야 밖으로 자꾸만 뱅뱅 도는 탓에 서로를 찾지 못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노년이 된 둘의 관계성을 꼭 닮았다. 타인의 시선을 나무라고 생각해본다면, 그들의 온전한 '우리 둘' 상태를 저지하는 그것은 뿌리 깊고도 단단하다. 마른 그들의 팔로는 채 다 뽑아낼 수 없을 만큼.
삶은 전쟁과도 같다. 간간이 찾아오는 꿀 같은 휴전 기간을, 마도와 니나는 매번 서로에게 내어 주었다. 그것도 기꺼이. 니나의 경우 용감무쌍하게 자신을 무장한 채 전쟁의 삶을 헤쳐 나갔지만, 어느 순간 무기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하는 마도에게 안타까움과 옅은 권태를 느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마도가 전쟁의 삶에서 완전히 밀려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포로가 된 후로는 깨달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빗발치는 총성 속에서도 기꺼이 무기를 내려놓을 줄 아는 감정일 것이라고. 그는 아직 체온이 충만한 손을 무기를 집는 것 대신 하나뿐인 연인을 안는 용도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이 영화의 결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드디어 마도와 여생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 순간이 도래한다. 그러나 니나는 간병인의 복수로 인해 떠나기 위해 모아둔 돈을 모두 빼앗기고 난장판이 된 집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그 전쟁통 속에서도 연인 마도는 존재한다. 아무리 깊은 무저갱의 절망이라도 사람에 대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이 참으로 야속하다. 그 때문에 피투성이의 발을 이끌고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사랑과 사람이 아주 비슷하게 발음된다는 점까지도.
서로를 껴안으며 왈츠에 맞춰 춤을 추는 연인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가 전쟁 속에서도 음악과 춤과 사랑이 있음을 말하는 건지, 반대로 사랑과 음악과 춤 속에서도 전쟁이 존재함을 말하는 건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고민의 끝은 어쨌든 두 가지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둘'뿐인 상태를 향해 마도와 니나는 계속해서 투쟁해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결말이었다. 어쩌면 사람은 속 빈 낭만만으로도 삶이라는 전쟁을 헤쳐나갈 수 있는 대책없는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 퀴어 영화의 팬으로서 이토록 색다른 리듬감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에 가까웠다. 꼭 한 번 관람하기를 추천한다.